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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학

The Oriental Studies , Dong Yang Hak

  •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사
  •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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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속간행물
  • : 계간
  • : 1229-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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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71)~68권0호(2017) |수록논문 수 : 1,037
동양학
68권0호(2017년 07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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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숙주(申叔舟)의 위국애민(爲國愛民) 양상(樣相)과 한시(漢詩) 연구(硏究)

저자 : 김영수 ( Kim Youngsoo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27 (2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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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閑齋 申叔舟(1417~1475)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6대를 섬긴 인물이다. 그는 세종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고, 세조에 의해 중용된 인물이다. 조선 초기 왕위 계승이 嫡長子가 아닌 定宗·太宗·世宗으로 이어졌고, 세종에 이어 文宗이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하면서 안정되는 듯하였으나, 2년 3개월의 짧은 재위기간으로 인해 端宗이 문종의 장남으로 12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宗室과 대신들 간에 국정운영 방식의 이견으로 갈등하다가 首陽大君이 癸酉靖難(1453)을 일으켰고, 단종이 世祖에게 禪位의 형식으로 왕위를 내어준다. 계유정난은 집현전 출신 학사들을 명분과 현실 추구의 두 파로 갈라놓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후 端宗復位사건으로 명분을 선택한 死六臣의 忠節논의와 현실을 선택한 이들의 變節논의가 역사에 중요한 화두로 남는다.
肅宗대에 와서 단종의 복위가 이루어지는 端初는 세조의 `當代의 亂臣이요, 後世의 忠臣`이라는 말이었다. 보한재는 변절자라는 불명예에 시달린 인물이었지만 일방적으로 매도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시대상황과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선택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한재는 學問에 대한 열정이 뛰어났고, 또한 中庸의 처신으로 자신을 절제한 인물이다. 國政에 임해서는 각 분야에 정통해 직무에 대한 강한 自矜心을 지녔다. 語學에 뛰어나고 외교와 국방의 현안에 대해 멀리 내다보는 叡智力을 갖추고 대비하였다. 事大와 交隣, 懷柔와 羈?를 적절히 구사한 그는 특히 對日외교에서 고려시대의 鄭夢周와 함께 일본에서도 그의 능력을 인정한 인물이었다.
보한재의 내면을 그의 漢詩 작품을 통해 분석했다. 1) 그는 明良相遇의 時運을 희구한 인물이었다. 2) 職務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고 예지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3) 보한재는 李施愛의 난을 겪고 성종의 士林政治를 보면서 功業에 대한 회의와 인생무상을 토로한다. 보한재의 모습을 추적하면서 功過를 통해 그의 본 모습을 재구하려는 것이 본 논문의 주제이다.


Shin-sook-joo(申叔舟:from 1417 to 1475, Pen Name:Bohanjae:保閑齋) is a subject who served from Sejong(世宗:4th King) up to Sungjong(成宗:9th King)`s tenure. Sejong appreciated his ability and another king Sejo(世祖) assigned him to a important post. At the early Chosun dynasty due to non-primogeniture succession(from Jungjong<定宗>, Taejong<太宗> to Sejong the royal authority was not stable. From Sejong`s tenure his primogeniture succeeded to the throne and the royal authority looked stable for a while. But due to short tenure(27 months) his first son Danjong(端宗) succeeded to the throne when he was only 12 years old. The Royal family and retainers had continuous conflicts on the way of government operation and Gye-Yoo coop(癸酉靖亂) took place in 1453 by Soo-yang-dae-goon(Sejo). Danjong yielded his king position to him in the end. Gye-Yoo coop separated scholars into two groups. One was upholding a cause and the other one was pursuing the reality. After a while there was a try to restore the Danjong`s king position and authority. The loyalty of Sa-yook-shin(死六臣:six members to support this try even sacrificing their lives) and the defection of the other group has become a main important historical topic that last for a long time. Sejo said “They(the six members) are treacherous subject at these days and will be loyal subjects in the later time”. This became an evidence that led to the restoration of Danjong`s original(King) position.
Even though he was suffered under the nickname of `betrayer` but I think that we can not disregard all of his performance only due to this. The choice can differ per each contemporary situation and personal values.
We analyze his chinese poems into three main topics. 1) He desired the timing that wise king and good subject meet and work together. 2) He was very self-confident for his work and had good power to foresee the future. 3) He went through the `Li-shi-Ae`s coop(李施愛亂) and politics by the Confucians during Sung-jong`s tenure. This made him felt skeptical about the performance that he achieved and the frailty of life. It is the main theme of this thesis that we reconstruct who he really was through tracking the historic records about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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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건륭제(乾隆帝)의 장춘원(長春園) 프로젝트에 관한 시론(試論)

저자 : 이은상 ( Lee Eunsang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9-43 (1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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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이전의 중국 왕조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청나라는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였다. 北京 城 바깥 서북쪽 교외에 세워진 거대한 여름 별장인 圓明園은 康熙帝(재위 1661~1722)가 네 번째 아들인 胤?(훗날 雍正帝)에게 하사한 園林이었다. 乾隆帝(재위 1735~1795)는 1749년에서 1772년까지 원명원의 동쪽과 남쪽에 또 다른 원림인 長春園과 綺春園을 조성했다. 각각 서쪽과 동쪽 그리고 남쪽으로 福海라는 호수를 끼고 있는 이 세 원림은 원명원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본 연구는 18세기 다민족국가였던 청나라를 다스려야 했던 건륭제에게 장춘원 조성이 어떠한 정치적 함의를 지녔는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장춘원에 조영된 대부분의 건축물들은 건륭제가 南巡에서 접한 江南의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원림들을 복제한 것이다. 건륭제는 강남의 수많은 이름난 원림들을 두루 돌아보았다. 그는 장인들과 예술가들을 대동하여 그들에게 현재 조성 중에 있는 장춘원에 옮겨놓고 싶은 원림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복제하도록 했다. 또한 그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장춘원에 유럽식 궁전인 西洋樓를 건설했다.
장춘원은 건륭제에게 그가 다스리는 광활한 청 제국의 축소판이었다. 장춘원은 건륭제에게 `盆景`처럼 그의 `천하세계`를 표상하는 미니어처 정원이었다. 건륭제가 장춘원에 복제하여 재현한 강남의 이름난 원림들은 그의 영향권에 있는 강남 지역을 표상하는 문화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향권에 있는 `천하세계`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상징물들을 수집하여 중앙에 집중시킴으로써 통치자는 그가 복제하여 재현한 대상들이 표상하는 지역들에 대한 지배를 공포하게 된다.


The Qing China Emperor Qianlong ruled was a multiracial nation. The matter of how to integrate harmoniously many ethnic groups with different languages and cultures into one was a very prominent question in the mind of Emperor Qianlong who had to govern a multiracial nation as a Manchu ruler. There were many cultural phenomenon which visualized his effort to construct “harmonious China” by means of integrating many racial minorities into one. Emperor Qianlong`s construction of the Garden of Eternal Spring can be understood in the same vein.
Most of buildings constructed in the Garden of Eternal Spring were the replications of captivating and beautiful gardens in the region of Jiangnan Emperor Qianlong saw during his southern tours. Emperor Qianlong toured many famous gardens in the region of Jiangnan. Emperor Qianlong accompanied by artisans and painters during his southern tours and made them to reproduce gardens he liked in the Garden of Eternal Spring. He also built Western Multistoried Buildings by the help of Jesuits.
The Garden of Eternal Spring was a microcosm of vast Qing Empire he ruled. The Garden of Eternal Spring was a miniature garden representing the world under heaven. The famous gardens in the region of Jiangnan which were reproduced in the Garden of Eternal Spring would be taken as cultural symbols representing the region of Jiangnan within the sphere of his influence. Ruler can announce his control of the regions by means of collecting cultural symbols representing regions of the world under his influence and assembling them on the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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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독립운동가 범정(梵亭) 장형(張炯)의 단군민족주의와 건학이념

저자 : 박성순 ( Park Sungsoon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45-64 (2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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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이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상을 교명에 담은 대학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國民, 檀國, 國學, 建國, 東國, 弘益, 新興 등의 교명을 내건 대학들의 등장은 해방과 독립이라는 문명사적 자의식에 기반한 민족의식의 발현이었다. 특히 이들 중 여러 대학들이 독립운동가들에 의해서 설립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다.
이중에서 `弘益人間`을 건학이념으로 표방한 학교는 단국과 홍익이 대표적이었다. 단국대학을 설립한 梵亭 張炯(1889~1964)은 독립운동 시기는 물론 8.15 이후에도 백범 김구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던, 김구 정치사상의 계승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었다. 따라서 장형의 건학이념은 8.15 이후 민족주의 세력의 입장과 지향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판단된다.
올바른 전통문화 계승의 핵심은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세계관에 있다. 장형의 단군민족주의는 사상탄압에 앞장선 일민주의와는 달리 민주주의 정착과 민족통일의 시대적 과제에 진지하게 대응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장형의 단군민족주의는 전통사상과 당대의 시대정신이 적합하게 조응할 때라야만 가장 이상적인 역사적 의미를 견지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imperialism in 1945, many colleges were erected with the names such as Kookmin, Dankook, Gukhak, Konkuk, Dongguk, Hongik, Shinheung etc. which contained dreams to build a new nation-state. Especially many of these colleges were erected by independence activists.
Those were Dankook and Hongik that expressed `Hongik-inggan` as the spirit of college foundation of all colleges at that time. The two colleges were also erected by independence activists. Dankook`s founder Jang Hyeong(1889~1964) whose nickname was Beom Jeong had taken activities with Kim Koo who was the president of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under Japanese rule particularly from the period of independence movement through after liberation. They said that Jang Hyeong was a successor of Kim Koo`s political idea. Therefore Jang Hyeong`s spirit of college foundation is a good case to examine the stance and intention of nationalist group after liberation in 1945.
The core for right succession of traditional culture is deeply connected with a view of the world watching the world and the humankind. Jang Hyeong`s Dan`gun nationalism has the meaning that tried to solve the tasks of the settlement of democracy and the establishment of a unified nation-state different from Ilminjueui(Ilminism) that advocated dictatorship and thought oppression. Jang Hyeong`s Dan`gun nationalism is a good case to show that only when traditional thought get along with the historical spirit of the current properly would have the highest ideal meanings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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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국내 학계는 2차 대전 이후의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 연구사에 관해 별로 주목하지 않았으나, < 해외 동아시아학 연구 성과(문헌) DB 구축: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 프로젝트는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 연구현황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 논문은 프로젝트를 통해서 구축된 문사철 및 전통 예술에 관한 약 2천 건의 DB를 기반으로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 연구 동향을 계량적 방법을 통해서 평가하고자 했다. 먼저 필자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구축된 DB가 얼마만큼 20세기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의 동향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해 최근 구글에서 개발한 빅데이터 기반의 북스 엔그램뷰어 프로그램을 사용하였다. 만일 소규모 DB인 <프로젝트> DB의 시계열적 변화패턴이 빅데이터 기반의 대조군의 시계열적 변화 패턴과 유사하다면 전자가 시대적 흐름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가설에 입각해서 몇 가지 도표를 비교해 본 결과, <프로젝트> DB와 빅데이터 DB의 시계열적 변화에 따른 패턴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이는 곧 <프로젝트> DB가 어느 정도 신뢰할 만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논문에서는 <프로젝트> DB를 통해 얻은 프랑스 학술계의 지형 변화와 시기에 따른 학술생산물의 산출량의 변화를 근거로 20세기 프랑스 동아시아학 연구사를 5분기로 시기 구분해 보았다.
본격적으로 <프로젝트>의 프랑스권 DB를 분석해 본 결과, 중국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일본학이나 한국학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한편 프랑스어권의 동아시아학은 전반적으로 동시대 연구에 가장 관심이 높았으며 고대로 갈수록 연구 성과물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연구할 대상도 풍부하고 동시에 현안과 직결되는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중국학과 한국학에서는 현대와 대비되는 가까운 전근대 사회에 관심이 많은 반면에 일본학에서는 근대 사회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아마도 주변 국가들에 비해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분야 별로 살펴보면 먼저 철학 및 종교에서 인류학의 범주에 속한 연구가 풍부하다는 점이 특징적인데, 이는 프랑스어권 동아시아학의 전통이다. 한편 종교 연구에서는 전반적으로 불교 연구가 가장 많지만 연구 대상 지역에 따라 중점적으로 연구되는 종교가 다르다는 점이 주목된다. 중국학의 경우, 도교가 특히 많이 연구되었으며 한국학은 무속신앙이, 일본학에서는 불교가 가장 많이 연구되었다. 유교의 경우, 철학적 내용에 관한 연구보다는 국가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에 관한 연구가 많았다. 문학과 언어학에 관한 연구들에서는 전반적으로 문학에 관한 연구가 언어학에 관한 연구보다 풍부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언어학을 전문으로 하는 『동아시아 언어학회지』에 대한 DB구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 동아시아 언어학에 관한 연구의 비중은 더 클 것이다. 문학 작품에 관한 연구 중에는 소설에 관한 연구가 많았는데, 중국 문학에서는 송대를 기점으로 운문에서 산문으로 연구 주제가 옮겨가는 경향이 뚜렷했다. 한편 소설에 관한 연구가 중국학에서 우세한 반면 시는 일본학에서 강세를 보였다. 역사학에서는 사상문화사에 관한 연구가 정치외교사, 사회경제사보다 풍부하였고 지역적으로는 중국사에 관한 연구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한편 시기적으로는 현대사 연구가 가장 많은 경향이 관찰되었지만 일본사에서는 특이하게도 다른 분야보다도 문화사와 사상사에 관한 연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아마도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끌었던 동력에 대한 관심과 신문물 유입에 따른 전통 문화의 변용 과정에 대한 관심에서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예술 분야의 경우, 전통 회화에 관한 연구가 다수를 차지했고 시기적으로는 모두 마지막 전근대 사회, 즉 명청 시대와 도쿠가와 막부 시대 작품들에 대한 연구가 많았다. 예술이론에 속하는 연구는 대부분 화론에 관한 것들로서, 주로 명청대의 화론이 논의되었다.


Korean scholars have not paid much attention to French school on the East Asian Studies after the World War II. But < East Asian Studies in Overseas Studies (DB) Project > gave us an opportunity to investigate the academic materials on East Asian Studies i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This paper evaluates the research trends of French speaker on the East Asian studies through quantitative method based on about 2,000 DBs. First, I used a big data-based book engram viewer program recently developed by Google to verify how much of the DB built through the < project > reflects the trend of 20th-century French-speaking East Asian studies. This is because if the time-varying pattern of the small DB project is similar to that of the control data set of the big data-based control, it is determined that the former fully reflects the current trend. Based on this hypothesis, it is found that the patterns of the < project > DB and the big data DB in terms of time-series changes are not exactly the same, but they are similar to each other. It means trustworthy. On the other hand, in this paper, based on the changes of the academic geography and the output of academic products during 20 century, I tried to classify the periods in the history of french research on East Asian Studies since 1900.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French database of < Project >, the Chinese studies was overwhelmingly superior to that of Japanese studies or Korean studies. On the other hand, the study of East Asian Studies in the French language was most interested in contemporary research in general, and it tended to decrease in research on more ancient periods. It is natural to have more interest in research subjects related with contemporary age. Interestingly, Chinese studies and Korean Studies are interested in a near pre-modern society as opposed to contemporary age, while Japanese studies are interested in modern society. Perhaps the interest of French scholars in the process of modernization of Japan, which has “successfully” modernized compared to neighboring countries, is presumed to have resulted in this. It is characteristic of the fact that there are abundant studies in the category of anthropology in philosophy and religion, which is a tradition of French East Asian studies. Whereas it is noteworthy that the religion researches have the most Buddhist studies as a whole, but the religions that are mainly studied are different according to the study area. In the case of Chinese studies, Taoism has been especially studied, but shamanism in Korean studies and Buddhism in Japanese studies. In the case of Confucianism, research on the function of the national ideology was the mainstream rather than the study of the philosophical contents. In literature and linguistics studies, literature studies are more abundant than linguistics studies in general. But we must not forget that the DB on East Asian linguistics has not yet been completed. In the field of literature, a study of novels is more abundant than a study of poetry. In the case of Chinese studies, there was a tendency that research topics were shifted from verse to prose, starting from the Song dynasty. Meanwhile locally, the study of novels was dominant in Chinese studies, but the poetry was strong in Japanese studies. In the field of history, there are abundant researches on the intellectual or cultural history rather than politico-diplomatic history and socio-economic history. On the other hand, it is noteworthy that Japan`s history of modern history is so high that modern studies tend to be more than half of studies on history of Japon. It is presumed that this result could have been derived from the interest in the power that successfully led to modernization and the interest in the process of transformation of traditional culture by influx of new culture. In the field of art, research on traditional paintings took the majority, and all of the studies in the period of the last pre-modern society, namely, the Ming-Qing Dynasties and the Tokugawa Shogunate. Finally, most of the studies belonging to art theory are the aesthetics in the Ming-Qing Dynas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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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국 고대사회 외래인(外來人)의 존재양태와 사회적 역할

저자 : 전덕재 ( Jeon Deogjae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97-133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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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이주한 外來人들의 현황, 존재양태, 사회적 역할에 대하여 살펴본 것이다. 고구려에 중국계 인사들이 적지 않게 망명하였고, 낙랑군과 대방군 병합 이후 그 유민들이 대거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고구려는 중국계 외래인의 세력기반을 그대로 존중해주다가 점차 고구려의 지배층으로 편제하였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고위관직까지 승진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중국계 流移民과 전쟁포로에게 토지를 분급하거나 일정 기간 부세를 경감시켜주어 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하도록 유도하였다. 백제로 이주한 낙랑·대방유민들은 백제에 한자문화와 더불어 유학을 전래해주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 가문은 백제의 최고 신분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또한 백제는 개별적으로 歸化한 외래인의 경우는 戶籍에 편제하여 관리하였다. 중국계 망명 인사와 낙랑·대방유민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한자문화 및 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그들이 중국어에 능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교문서를 능숙하게 작성할 수 있는 학문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중국 왕조에 파견한 사신 으로 널리 발탁되었다. 9세기 후반에 신라의 경문왕과 헌강왕이 漢化政策을 추진하면서 國王 또는 東宮의 近侍職에 유학과 학문에 조예가 깊은 중국에서 귀화한 관료가 다수 등용되었다. 신라 當代에 중국계 인물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지만, 그 후예들은 고려에 중용되어 학문실력에 의거하여 관리를 등용하는 내용의 관료제 운영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6세기 중반에 백제 성왕이 반백제계 왜인을 견제하거나 왜에 군사를 요청하기 위해 왜계 백제관료들을 왜에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또한 군사적 목적으로 왜계 백제관료를 등용 하였음이 확인된다. 4~6세기에 고분벽화와 토우를 통하여 고구려와 신라에 西域人으로 구성된 流浪樂人들이 來往하여 百戱와 舞樂을 공연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서역인들은 異國의 문화를 삼국에 전해주어 삼국의 문화발전에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대문화가 국제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게 하는 데에도 一助하였다.


This article examines the status, existence and the social role of immigrants who migrated to Goguryeo, Baekje, and Silla. A substantial number of people from China defected to Goguryeo, and after the annexation of Lelang and Daifang Commandery, a number of their people were incorporated into Goguryeo. Goguryeo respected power base of people from China for a considerable period of time. However, the people from China gradually became part of the governing body in Goguryeo and some of them were even promoted to senior government positions. To induce the stable settlement of war prisoners and the Chinese immigrants, Goguryeo distributed land and reduced their tax burden for some years. The immigrants of Lelang and Daifang, who emigrated to Baekje, introduced Chinese character culture as well as the Confucianism to that State. Some of them were incorporated into the highest status of Baekje. Also when it comes to foreigners who became naturalized individually, Baekje supervised them by adding them to the household register. Chinese immigrants and the people of Lelang and Daifang, and their descendants significantly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Chinese character culture and Confucianism in Goguryeo and Baekje. They were widely chosen as envoys to China, since not only they were proficient in Chinese, but also they possessed academic skills to write the diplomatic documents. In the late 9th century, for the purpose of promoting Sinicization policy, King Kyeongmoon and King Heongang of Shilla hired many of the naturalized Chinese bureaucrats, who had deep knowledge in study and Confucianism. At that time of Shilla, political influence of the naturalized Chinese bureaucrats was limited. However, their descendants greatly contributed to the establishment of Koryeo`s bureaucracy by formulating a meritocratic hiring policy, thus Koryeo`s government officials were appointed based on their academic abilities. It can be confirmed that in the mid-6th century, King Seong of Baekje sent Baekje`s bureaucrats from Wa to that State as envoys. He dispatched them for the purpose of holding anti-Wa bureaucrats in check or requesting Wa`s military assistance. Also, it can be confirmed that he hired some people from Wa as Baekje`s officials for the military purposes. Mural paintings and clay dolls of the 4th-6th centuries suggest that wandering the Western regions musicians visited Goguryeo and Silla at that time. They performed the entertainment and dance music. By introducing the foreign culture, the western regions people not only contributed to the cultural development of the three kingdoms but also played a part in the development of ancient culture`s international and universal charac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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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고려후기 색목인(色目人)의 이주(移住)와 삶

저자 : 김철웅 ( Kim Cheolwoong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35-152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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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元 제국 내에서 위구르, 회회 등 색목인의 역할은 매우 두드러졌다. 원 성립 이후에는 많은 색목인들이 중원으로 이주하였다. 이에 고려는 蒙元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히 색목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張舜龍, 閔甫, 崔老星, ?遜·?長壽, 李玄 등은 고려에 정착한 대표적인 색목인들이다. 張舜龍, 閔甫, 崔老 星, 李玄 등은 고려와 원이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충렬왕 때에 고려로 이주하였다. ?遜·?長壽는 원·명 교체기에 이주한 색목인이다. 이들 색목인은 고려 관료로서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주 색목인 중에는 상인들이 많았다.
고려 사회에 `回回家`가 존재했으며 고려가요 「雙花店」에는 `回回아비`가 등장한다. 이들 색목인들은 원 간섭기에 고려에 정착하여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특히 색목인 崔老星은 富商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는 고려 에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던 大商人이었을 것이다.
고려에 이주한 색목인 상인들은 대부업, 도축업, 그리고 일반 상업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특별히 고려 사람과 구분되는 곳에 거주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들은 개경 시전에서 일반 백성과 어울려 살며 장사하였는데, 때로는 왕실과 거래한 상인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습속을 지켜나가고 있었을 것이다. 즉 고려의 무슬림들은 변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몽골인과 색목인의 이주로 인해 고려에서는 축첩이 문제가 되었다. 그들이 가진 축첩의 습속으로 인해 고려 사회에 문제를 야기하였던 것이다. 한편 몽원 시기에 위구르문자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고려에서도 위구르문자를 아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Under Mongol·Yuan empire, the role of Semu people, such as Uighur and Huihui, were very conspicuous; and since the establishment of Yuan dynasty many Semu people had immigrated into the central China. For the reason, Goryeo within the relationship with Mongol came to contact with Semu people accordingly.
Jang Sunryong(張舜龍), Min Bo(閔甫), Choi Roseong(崔老星), Seol Son(?遜)·Seol Jangsu(?長壽), and Li Hyeon(李玄) were noticeable Semu people who settled in Goryeo. Jang Sunryong, Min Bo, Choi Roseong, and Li Hyeon immigrated into Goryeo during King Chungryeol`s reign in which Goryeo and Yuan began their full-scale interchanges. Nextly, amongst the Semu people that immigrated in Yuan-Ming transition period were Seol Son·Seol Jangsu. These Semu people mostly served as diplomatic bureaucrats for Goryeo court. And, among the Semu immigrants were merchants as well.
In Goryeo society were `Huihui families(Hoehoega/Huihuijia:回回家)`, and in Ssanghwajeom (「雙花店」) appears a `Huihui sire(Hoehoe-abi)`. Semu people settled in Goryeo and were engaged in commerce during the Yuan interference era. Depending on the fact that Choi Roseong was called a wealthy merchant, it seems that he was a large-scale merchant dealing with trade and commerce in Goryeo.
Semu immigrant merchants in Goryeo served in loan financing, butchery, and general commerce. It seems that they did not reside in ghetto which was separate from Goryeo people. They traded with the royal court, and lived with general public and ran their business in Gaegyeong`s market place. Yet, the immigrations of Mongolian people and Semu people caused the matter of concubinage, which was their folkway, in Goryeo society. Meanwhile, as Mongol and Yuan used Uighur scripts, among Goryeo people appeared some who were literate in Uighur scrip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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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조선전기 일본인의 향화(向化)와 정착

저자 : 한문종 ( Han Moonjong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53-173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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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향화왜인의 발생배경은 조선의 왜구대책과 토지나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생활고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초기의 향화왜인은 왜구로서 투항한 降倭가 많았다. 그 후 향화왜인은 拘留倭人과 포로, 생활고 때문에 향화한 자, 대마도주의 使送倭人, 송환된 피로인을 따라 온 자, 倭僧, 삼포에 거주하는 恒居倭人 등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1444년부터 일본에 거주하는 왜인에게도 관직을 제수함에 따라 향화왜인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조선에서는 향화왜인이 집단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산간지방에 分置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또한 향화왜인의 外方 출입을 금지하고 사적인 왕래 및 통신을 금지하였다.
조선초기 향화왜인에 대한 기본정책은 가는 자는 막지 않고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향화왜인 중에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向化僧 信玉과 雪明처럼 수년 동안 전국의 각지를 유람하여 산천의 형세와 허실을 모두 알고 있는 자들은 정보의 유출을 우려해서 돌려보내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관직을 제수받지 못한 일반 향화왜인을 각 지방에 분치하여 식량과 토지, 의복, 집 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조선에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 동안 田租, 賦役, 軍役을 면제해주었다. 반면에 향화왜인 중에서 왜구의 우두머리나 의술·제련술 등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벼슬을 주고 서울에서 거주하게 하였다. 이들은 관직에 상응하는 녹봉과 의복, 집, 노비 등을 지급받았으며, 일부는 성씨와 이름, 관향을 하사받았다. 한편 조선에서는 향화왜인 중에서 죄를 지은 자는 조선의 법률에 따라서 처벌하였으나 減罪律을 적용하여 가볍게 처벌하였다.
조선의 향화왜인 우대책에도 불구하고 향화왜인과 그의 후손들이 조선의 사회에 정착하여 생활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첫째 향화왜인의 대부분이 對馬島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어로나 상업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농사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둘째는 일본과 조선의 언어 및 문화, 풍습 등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셋째 임진왜란으로 계기로 조선에서는 일본을 `不具戴天의 원수`로 인식하고 있었다. 넷째, 조선중기 이후 족보가 보급되고 동족마을이 형성되면서 자기 가문과 가계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향화왜인은 조선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거나 자신의 출신을 감추고 살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The naturalization of the Japanese in the early Joseon dynasty occurred from some counter plans of the government for Japanese pirates or their hard living such as the shortage of land and foods. Especially there were many surrendered pirates among the naturalized Japanese in the early times. Afterwards Japanese naturalization was expanded to the detained, captives, the naturalized of one`s own accord because of difficult living conditions, envoys from Tsushima, escorts to dispatch drifters, monks, and the Japanese residing in the three ports. However, since 1444, the number of the naturalized Japanese had decreased sharply due to the fact that, the Joseon government began to give office to the people living in Japan.
In order to prevent the grouping of the naturalized Japanese, the government forced them to divide into inland mountains far away from the beach to prepare for emergencies. Joseon also prohibited the Japanese from going outside and prevented them from traveling and communicating privately.
In the early Joseon period, the basic policy of the government for the naturalized Japanese was not to stop them going or not to refuse to come. Therefore, some of the local residents returned to Japan. However, because of the leak of information, the government did not return those who knew the status and reality of the mountain by visiting various parts of the country for many years, such as the naturalized monks Shinok and Solmyong.
The Joseon government distributed the naturalized Japanese, who did not receive the government`s office, to each province, and gave them food, land, clothing, and houses. And they were exempted from taxation, compulsory labor, and military service for a certain period so that they could settle quickly in Joseon. On the other hand, some Japanese received preferential treatment from the government. The people who had been a head of Japanese pirates or had the skills of medicine, smelting, etc., got official positions from the government and were allowed to reside in Seoul. And they were given salaries, clothes, houses, and slaves, corresponding to their offices, and some received their surnames, names, and places of origin. And the naturalized Japanese who committed the crime were punished according to the laws of the Joseon Dynasty, but lightly penalized by applying the decrees decreasing punishment.
Despite the preferential treatment of the government, it seems that the naturalized Japanese and their descendants could not settle down in the Joseon society. The reasons can be estimated as follows. First, the Japanese were interested in fishing or commerce because many of them were from Tsushima Island, but were not accustomed to farming. The second is the difference in language, culture and customs between Japan and Korea. Third, Joseon people regarded Japan as a deadly enemy after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Fourth, as the genealogy began to spread widely after the middle of Joseon Dynasty and the consanguineous villages were formed, the perception of lineage and clan was expanded.
Because of this background, it is presumed that the naturalized Japanese could not adapt well to the society of Joseon, or they would have lived with their identity hid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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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화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착과 한국 인식

저자 : 방상근 ( Bang Sangkeun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68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175-19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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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76년부터 1910년 사이,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 정착과 한국에 대한 인식 문제를 살펴본 글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재입국한 1876년 이후 신자공동체를 재건하는 한편, 전교회장을 양성하고, 고아원, 양로원, 시약소, 무료 장례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학교도 운영하였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 천주교 의 인상을 좋게 하고 외교인들을 감화시켜 신자수를 증가시켰고, 천주교가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선교사들의 정착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선교사들은 조불조약의 `영사재판권, 외국인 보호` 조항과 프랑스 공사의 후원을 토대로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이들은 양대인으로 호칭될 정도로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이 커졌고, 이러한 선교사들의 지위 향상은 교세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1895년 1월에 있었던 남종삼과 홍봉주의 신원 조치와 8월에 있었던 뮈텔(Mutel) 주교의 고종 알현도 선교에 영향을 미쳤다. 역적으로 취급되던 신자들이 신원되고, 사교라고 탄압받던 천주교의 책임자가 국왕을 만났다는 것은 선교사들이 지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한편 개화기 한국 사회에 정착했던 선교사들은 서구문화 우월의식에 입각하여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평가했고, 한국이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낙후되었다는 인식 아래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외면했다. 선교사들은 착취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일제의 침략이 의미하는 바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체제옹호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가 유지될 때에는 왕조 체제를 옹호했고, 1905년 이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결국 종교의 자유, 한국의 독립 능력에 대한 회의가, 개화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의 민족 문제를 외면한 이유지만, 이러한 인식의 기저에는 프랑스인으로서 한국 문제를 바라보는 타자의 입장이 깔려있었다고 하겠다.


Since their return to Korea in 1876, French missionaries, in efforts to reconstruct a Christian community, had engaged in community activities such as cultivating catechist, offering free funeral services and running orphanage, nursing home, pharmacy and even schools. Their outreach efforts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interactions between the Catholic Church and local communities and contributed to increasing the number of Catholics in Korea. In the meantime, the French missionaries were able to settle down in the country.
They carried out their missionary work based on the Korea-France Treaty`s provisions for consular jurisdiction and the protection of foreigners and with support from the French Minister to Korea. As a result, they came to have considerable influence and better status especially in rural communities. Furthermore, the exoneration of Nam Jong-sang and Hong Bong-ju in January 1895 and the audience of Bishop Mutel with King Gojong in August of the same year constituted important backgrounds for missionaries to settle down in a local community.
Meanwhile, those missionaries who settled in Korea during its Enlightenment Period treated Korean people and their culture with a Western sense of cultural superiority and recognized the Japanese rule of Korea based on the perception that the country was politically corrupt and backward, ignoring the issue of Korean independence. The missionaries took a pro-regime position in order to have freedom of religion guaranteed, although they were well aware of the difficulties of the people who had suffered exploitation and had a understanding of what Japan`s invasion did mean. Consequently, they supported the Joseon Dynasty`s regime while it was in place and accepted the Japanese rule after the forced Eulsa Treaty concluded in 1905.
In conclusion, the freedom of religion and doubts about Korea`s ability to achieve independence constituted a main reason why the French missionaries ignored Korea`s national issues during the Enlightenment Period; however, the way that they looked at Korean problems as Frenchmen can be said to have underlain such percep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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