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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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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6)~118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956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18권0호(2018년 06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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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세기 조선 천주교의 죄 관념 연구

저자 : 조현범 ( Cho Hyeon Beom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1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7-38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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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죄(罪)라는 관념은 공동체의 행위 규범에서 벗어난 행위를 단죄할 때 사용되었다. 또 유교적 가치 규범에 따라 백성들을 교화하고 예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강상의 윤리나 수신의 도덕 실천을 강조할 때 죄 혹은 죄인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불교의 경우에는 윤회설에 입각하여 현생에서 겪고 있는 모든 상황을 카르마, 즉 전생의 업보로 설명한다. 이처럼 세속 공동체의 행위 규범이건, 유교나 불교의 종교적 가치 규범이건, 조선 사회에서 죄라는 개념은 현실에서 일어난 당사자의 특정 행위와 관련된 것이다. 이에 비해서 19세기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기록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죄, 죄인 등의 표현은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에 관한 모든 일을 주재하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계명을 어겼거나 완수하지 못했다는 자책의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때에 따라서는 천주교 신자 개인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인간이 신의 명령을 어기면서 발생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담아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이건 천주교가 신자들에게 제시한 죄 관념은 전통 한국 사회의 가치 규범에 내재된 죄 관념으로 볼 때 상당히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19세기 천주교 신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통하여 배운 죄 관념은 다음과 같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천주의 명령을 어기면서 발생한 원죄는 그 자손이 되는 모든 인간들에게 전해져서 영혼의 타락을 초래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간들 각자는 스스로 죄를 짓게 되었다. 천주가 인간을 창조하면서 그 양심에 계명을 새겨 천주의 명령대로 살도록 하였지만 원죄로 인한 영혼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죄를 짓고 지옥으로 떨어질 운명을 안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의 죄도 용서받고 또 돌아가신 조상이 연옥에 머무르는 기간도 단축할 수 있는 의례들을 실천하였다. 한편 죄에 대한 윤리적 해석 방식은 천주와 인간의 관계를 가부장적 윤리로 설명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런 점은 유교적 가치관과 매우 유사한 면을 보인다.


For the Choseon Dynasty, the concept of crime was used to condemn any act that deviated from community norms. In addition, to enculturate Confucian value norms and to maintain the order of the religion, the labelling of deviant acts as crime or criminal served to demoralize such behaviors as anti-Confucian. In the case of Buddhism, Karma, that is, the karma of the past life, explains all the situations in the present age based on reincarnation theory. The concept of sin in Choseon society is related to specific acts people commit while living, regardless of whether these norms are of the secular community or of the religious values of Confucianism or Buddhism. On the other hand, expressions such as 'sin,' 'sinner,' and so on, frequently appeared in records of the nineteenth-century Korean Catholics. These records included episodes of failure or an inability to uphold the commandments of God. Also, in some cases, regardless of their Catholic beliefs, some might still define themselves as sinners, either born into sin or as a result of having broken divine laws. In either case, the Catholic Church's view of sin is heterogeneous considering the guilt inherent in the value norms of traditional Korean society. Catholic believers taught the notion of sin in the 19th century through Catholic Catechism. Man's original sin, occurred when the forefather of mankind, Adam broke God's commandments. This original sin was passed on to all descendants of man, resulting in the fall of the soul. When the Lord created man, he inscribed conscience in man's mind to live within the edicts of His commandments. Due the original, men committed a crime and fell to hell. Thus, the Catholic believers of Choseon practiced rituals to shorten the period of stay in purgatory for their ancestors who had already died, and to forgive their sins. However, the ethical interpretation of sin has tended to explain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 with patriarchal ethics. This relationship is very similar to Confucian va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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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칠정(七情)'에서 '감정(感情)'으로 - 감정 관련 번역어의 수용과 사용

저자 : 서호철 ( Seo Ho-chul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1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9-79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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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정서 같은 말은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서구 철학·심리학 저작들을 번역하면서 만들어졌다. 이성·의지와 구별되는 감정 개념은 동아시아에서는 낯설었지만, 전통적 어휘 가운데 그나마 비슷한 것으로는 情이나 七情을 들 수 있었다. 조선에는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 이래 학회지와 논설을 통해 심리학의 감정 개념이 소개되었다. 감각적·감정적 존재로서 개인의 자각은 중요한 근대화의 과제로 부각되었고, 1910년대 이광수는 (感)情의 표현을 근대문학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그런 정이란 무척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한편 『황성신문』이래 신문 기사에서 감정은 한 국가나 민족이 타자에 대해 갖는 태도를 가리켜 사용되기도 했다. 감정·정서 등의 신조어가 여러 종류의 辭典에 확실히 등재되는 것은 1920년대 후반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문학과 국제정치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감정의 개념은 각기 달랐고, 심리학적 정의나 사전적 의미와도 맞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쓰는 감정·정서라는 말의 의미는 그런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 우리는 사전적 의미를 익혀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그 말을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를 배움으로써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된다. 개념어의 연구에서 사용의 문제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The words '感情(gam-jeong)' and '情緖(jeong-seo)' meaning 'emotion', were coined in the late 19th century when the Japanese started to translate Western philosophical and psychological works. The trichotomy of 'reason', 'emotion' and 'will' were rather unfamiliar in East Asia. Such words as '情(jeong)' or '七情(chil-jeong, seven emotions)', among traditional lexicon, can be viewed to be close to 'emotion(s)'. The word '感情' was introduced to Joseon through academic journals and articles since Yoo Kil-jun's Seoyugyeonmun (1895). In 1910s, Lee Gwang-soo claimed that realistic descriptions of emotions should be the core of modern literature. Meanwhile, in other areas, such as newspaper articles, '感情' was often used to mean the (negative, in many cases) attitude of one nation or ethnic race toward another. It wasn't until the late 1920s that such new words as '感情' and '情緖' were entered into dictionaries of various kinds. However, the exact connotations of '感情' used in the area of literature and international politics was slightly different and did not correspond to psychological definitions or dictionary meanings. This may be due to the polysemic characteristic of the Chinese character '情'. This might also be attributed to the traditional system of thought interfering with the imported one, or to the Japanese impact on the Korean language during the colonial rule. The meanings of '感情' and '情緖' used now in our daily lives seem to be settled in such a way. As Ludwig Wittgenstein pointed out, we learn the meanings of a word not by referring to the dictionary but by learning how and when to use them in our daily lives. More attention should be paid to the problems of use in the study of concept 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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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근대전환기 국문 신문에 나타난 감정 표현의 담화 기능

저자 : 안예리 ( An Yelee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1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81-11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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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담화가 역사성을 갖는다는 비판적 담화 분석 이론의 기본 전제에 따라 『독립신문』, 『매일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19세기 말 20세기 초 국문 신문 논설에 사용된 감정 표현들의 담화 기능을 분석하였다. 1절에서는 본 연구의 문제의식과 연구 방법론, 연구 자료를 소개하였다. 2절에서는 근대전환기 신문에 사용된 감정 표현들이 보도의 미숙성에 따른 부연적 논평이 아니라 '계몽'이라는 근대 초기 신문의 시대적 사명을 달성시키는 핵심적 담화 기능을 수행했음을 살펴보았다. 당대 국문 신문들은 타국의 간섭과 압제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심을 일깨움으로써 애국을 향한 정념을 형성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집단적 분노를 일정한 방향으로 계도해 가고자 했다. 3절에서는 형용사, 과장법, 신체 관련 비유, 동물 관련 비유 등 근대전환기 신문에 사용된 감정 표현의 언어 양식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감정 표현들이 비판의 대상에 대한 신문사의 입장과 관점에 따라 전략적으로 선택되고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4절에서는 연구의 내용을 요약하고 본 연구의 한계점과 남은 문제를 제시하였다.


The study aims to analyze the function of emotional expressions used in the Korean newspaper articles in the modern transition period under the premise of Critical Discourse Analysis theory. Four Korean newspapers published in the late 19th century and early 20th century were analyzed, namely the Dongnipsinmun, Maeilsinmun, Jeguksinmun, and Daehanmaeilsinbo . Section 1 introduces the research problem, the methodology, and the research data of this study. Section 2 discusses that the emotional expression of the modern transition newspaper and how it closely relates to the enlightened function of the newspaper. Writers of the newspaper not only seek to raise awareness among readers but also guide the way of emotional expressions in particular directions. Section 3 examines specific examples of emotional expression used in modern transition newspapers, such as adjectives, exaggeration, physical metaphors, and animal-related metaphors. This analysis showed that emotional expressions were chosen strategically according to the newspaper's position and point of view on the subject of criticism. Section 4 summarized the content of the study and presented its limitations and some remaining issues of the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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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된 식민정책학자 ― 이즈미 아키라(泉哲)의 식민정책론과 <국제공법강좌>

저자 : 정준영 ( Jung Joon You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1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15-14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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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경성제대의 국제법학자 이즈미 아키라(泉哲)를 사례로 삼아, 하나의 학문분야로서 일본의 식민정책학이 어떻게 식민지의 실제 현실과 조우할 수 있었으며 그 조우의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검토한다. 이즈미 아키라는 1920년대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식민정책학자로, 국제주의와 이상주의를 기반으로 동화주의를 표방했던 일본의 식민지통치가 가진 낙후성을 비판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반동화주의자로서 그는 일본의 식민지들에 최종적으로는 토착민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통치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1927년 경성제대 교수로 임명되었다. 식민정책학자가 식민정책의 현실 속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왜 식민지로 갔던 것일까? 식민지에서 그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런 변화는 식민지 특유의 제약의 산물이었을까, 아니면 그 자신의 이론이 가진 한계일까? 이 글에서는 이런 의문들에 대한 몇 가지 실마리를 찾아본다.


In this article I examines how 'Colonial Policy Studies(CPS)' as an area of academic research has encountered the actual reality of Japanese Colonies and what its implications are, through the case of Akira Izumi, a scholar of international law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It is well known that Akira Izumi was a liberalist scholar of CPS representing the 1920s Japan, criticizing Japan's colonial rule of assimilationism based on internationalism and idealism. As anti-assimilationist, he also hoped that Japan's colonies would finally be autonomously ruled by the colonized. However, he was appointed professor at Keijo Imperial University in 1927. A idealistic scholar of CPS has jumped into the grim reality of colonial policies. Why did he go to colonial Korea? How did he change in this colony? Was such a change a product of colonial situations or limitations of his own CPS theory? This article explores some clues to these ques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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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30-40년대 기생 가수들에 대한 젠더론적 연구

저자 : 이진아 ( Lee Jin-a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1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45-176 (3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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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930-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신민요를 노래했던 기생 가수들에 대해 젠더론적인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대표적인 기생 가수들인 왕수복, 선우일선, 이화자의 사례를 통해 '신민요, 여성성,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식민지 대중가요, 그 중에서 기생 가수들이 취입한 신민요의 경우 중층적으로 정형화된 여성성이 투영된 대표적인 음악 장르였다. 이는 남성 엘리트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원시적인 대상으로서 조선성과 여성성이 결합된 기표를 전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하위의 존재 위치에 있던 조선 기생이 신민요 가수로서 호명되었고, 이를 통해 기생 가수들은 오래된 여성 혐오를 뚫고 나올 수 있었다. 기생 가수를 둘러싼 젠더 담론에서 왕수복과 선우일선은 정형성 내에서 각각 가장 유동적이고 순응적인 수행성을 보여주었고, 이에 비해 이화자는 정형성 자체를 이탈하는 수행성을 드러냈다.


This study researched gisaeng singers who sang new folk songs during the colonial Chosun in the 1930's-40's based on the frame of gender theory. Specifically, the study examined the problems of 'new folk songs, femininity and sexuality' through the cases leading gisaeng singers: Wang Su Bok, Seonwoo Il Seon, and Lee Wha Ja. New folk songs released by gisaeng singers were the leading music genre in which multi-layered and formalized femininity is projected. This is because they exhibit signs that combine femininity and the nature of Chosun as a primitive subject through the gaze and language of male elites. But during this process, Chosun gisaengs were called new folk song singers and paradoxically situated in the lower class and at the bottom rung of society. However, gisaeng singers were ironically able to avoid misogyny through their occupation. In gender discussions on gisaeng singers, Wang Su Bok and Seonwoo Il Seon illustrated the most flexible and adaptive performativity of the field, while Lee Wha Ja revealed the performativity deviating from the formation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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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출산력조사를 통해 본 일본의 인구정치, 1940~1950년대

저자 : 김인수 ( Kim In-s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1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77-21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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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40-50년대 일본의 출산력조사를 중심으로 인구담론의 궤적을 추적하고 그 정치적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이 시기 일본에서 인구를 바라보는 프레임은 “과잉인구론” → “인구감소사회론/자원인구론” → “산아제한론”으로 급격히 변화해 갔다. 1930년대까지 농촌의 과잉인구 문제는 심각했고, 일본 국가는 이 문제를 산업화와 해외이민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정부는 산아제한을 대안으로 상정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인구를 물질적 자원으로 파악하는,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총력전시대'의 관념이 존재했다. 또, 당시 유럽에서 목격되는 인구감소 사회로의 전환이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를 반면교사로 삼으려 했다. 1940년에 후생성은 출산력조사를 통해 도농별, 직업별 출산력의 양태를 관찰했다. 일본인구의 증식을 핵심의제로 삼는 《인구정책확립요강》(1941)은 이 출산력조사를 근거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GHQ/SCAP의 점령기 동안 일본의 인구담론은 출산조절을 통한 인구억제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패전 이후 일본사회는 대륙으로부터 귀환한 인구와 베이비붐으로 인해 실업과 빈곤의 함정에 빠졌고, 산아제한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부상하였다. 나아가 산아제한은 인구의 질을 담보하면서 합리적인 가족의 크기를 결정하는 시민주체의 덕성으로서 의미화되었다. 록펠러재단을 필두로 한 미국의 민간재단은 일본 인구학자들의 출산력조사에 소요되는 연구비를 지원하고 연구자 교류를 확대함으로써 이러한 인구 담론의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일본의 인구담론에는 늘 일본 민족인구의 순혈성과 압도성에 대한 집착이 존재했다. 1945년 이전, 일본의 출산력조사의 결과물은 중국, 소련, 인도의 출산력과의 비교를 거쳐 안보위기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소비되었다. 피식민지 민족인구의 높은 출산력에 대한 위기감도 심각했다. 이러한 경향은 1945년 이후 일본 국가의 마이너리티 인구에 대한 방출의 시도로 이어졌다. 과잉인구사회로부터 저출산고령화사회로 이어진 일본 인구의 거대한 생애사적 순환은 '인구담론/표상의 정치적 구성'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This article, focused on a fertility survey, aims at tracing the trajectory of the demographic discourse of Japan in the 1940s and 1950s to understand its political meaning. At that time, the frame for considering the population in Japan rapidly changed from the “overpopulation theory” to the “population-decrease society and population-resource theory” and to the “birth control theory.” Although the problem of overpopulation in rural communities was a serious one, Japan's state attempted to resolve the problem with industrialization and immigration policies until the 1930s. However, at the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did not consider birth control as an alternative. Here, there was a concept of population of 'total war system' that manpower was recognized as material resources. At the same time, it was thought that the shift to a “population-decease society” witnessed in Europe factored into the weakening of national power, and Japanese government recognize it as a bad example. The Ministry of Health and Welfare conducted the fertility survey (1940) and examined the conditions of fertility by city, rural areas, and by occupation. The “Population Policy Establishment Guidelines” (1941), which set the growth of the Japanese population as the core issue, was established based on this fertility survey. However, during the occupation of GHQ/SCAP, Japanese society was caught in a trap of unemployment and poverty due to population repatriated from the continent and the baby boom. Birth control also became a direct means of solving this problem. Furthermore, birth control was interpreted as the virtue of democratic and rational subjects, which guaranteed the quality of the population and determines the size of a reasonable family. The U.S. private foundation, for example, the Rockefeller Foundation played a critical role in changing this kind of population discourse by supporting the research expenses required for a fertility survey of Japanese demographers and expanding intellectual exchanges. On the other hand, there was always an obsession with pure-breddedness and overwhelmingness of the Japanese national population. Prior to 1945, the results of Japan's fertility survey were compared with those of China, the Soviet Union and India, being consumed as a way to stimulate the security crisis. There was also a serious sense of crisis about the high fertility of the colonial people. This tendency led to an attempt to expel minority group by Japan's government since 1945. The historical cycle of the Japanese population, which resulted in low fertility and aging society today, needs to be reviewed in the context of the history of population disc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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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단사회학자에서 맑스-레닌주의 이론가로 - 신진균론(2)

저자 : 김필동 ( Kim Pil-dong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1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13-272 (6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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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회학자 신진균(1913~미상)이 1945년 해방 이후 1950년 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에 걸어간 삶의 궤적을 연구한 것이다. 1930년대 후반 동경제대 사회학과 학부와 대학원에서 공부한 신진균은 1941년 조선에 돌아와 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조선의 농촌과 가족에 대한 조사연구를 수행했으며, 그 결과를 일본사회학회에서 발표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그를 '강단사회학자'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해방 후 그는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교육과 문화 분야의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 시기에 그는 조선공산당에도 가입했지만, 그의 사회참여 활동은 강단사회학자의 면모를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46년 5월 이후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노골화되자, 이에 대항하는 정치운동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고, 이후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의 제1차 공판정 밖에서 일어난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현장에서 체포된 뒤 감옥에 수감되면서 그의 정치적 선택은 점점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수감생활에서의 열악한 환경과 부당한 처우, 단정 수립을 향한 미군정과 극우 정파들의 움직임은 그의 저항의지와 이념 지향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1948년 석방된 뒤에도 신진균은 학계로 복귀하지 않고, 남로당 지하당의 이론진 간부로서, 맑스-레닌주의 이론가로서 혁명적 정치활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한 차례의 체포와 수감생활을 더 겪은 뒤, 한국전쟁 중에 북한으로 건너가 맑스-레닌주의 이론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This paper studies a section of life history of a sociologist, Shin Chin-kyun (申鎭均) during the 1945-1950 period. He studied sociology at Tokyo Imperial University in the later 1930s. After returning to colonial Korea in 1941, he became a professor of Myung-ryun College. In the earlier 1940s, he conducted empirical research on Korean villages and families and presented the results at the annual conferences of the Japanese Sociological Society. He may well be called an 'academic sociologist' at that time.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ism in 1945, Shin taught sociology at Myung-ryun College and at Seoul University on the one hand and he participated in social movements in the fields of education and culture on the other. Although he joined the Korean Communist Party at that time, nonetheless, he maintained in part the characteristics of an academic sociologist. But he paid more attention to political movements as the U.S. Military Government (USMG) strengthened the oppression policy against the Korean Communist Party. His political choice became irrevocable, when he was arrested in a protest rally that occurred outside of the Court of the First Instance on the 'counterfeit' case at Chosun-Chungpansa. He was eventually sentenced to four years in prison in the USMG Court. The poor environment and unjust treatment in prison and the movements of USMG and parties for a sole government in South Korea strengthened his will of opposition and ideological orientation. As a result, he did not return to academia after his release. Instead, he joined the revolutionary political movement for the South Korean Labor Party as a leader of theorists group of Marx-Leninism. He went to North Korea during Korean War and continued in a career as a Marx-Leninist theorist, after another arrest and imprisonment in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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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하미마을의 학살과 베트남의 역사 인식 ― 위령비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한다'

저자 : 한성훈 ( Han Sunghoon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1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73-30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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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베트남 꽝남성 하미마을의 학살에 대한 위령비의 여러 가지 쟁점을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한다'라는 베트남의 역사인식으로 설명하였다. 피해자와 참전군인의 증언, 현지조사, 인민위원회 자료를 활용해 기념물 건립과 그 이후의 전개과정, 디엔즈엉사 인민위원회와 유가족의 입장을 살펴보았고 위령비문에 대한 한국정부의 개입과 베트남 공산당의 조정 과정을 분석하였다. 위령비문에 가해자로서 청룡부대를 표기한 인민위원회와 유가족, 그리고 기념물 건립 비용을 지원한 참전군인 사이의 갈등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미래를 향해 과거를 닫는다'라는 베트남의 역사 인식과 공산당의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 머이' 선언은 긴밀한 내적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미래를 향해 과거를 닫는다'라는 원칙은 과거를 부정하거나 망각하는 것이 아니며 국제관계에서 평화와 인도주의 원칙을 공동체의 집단기억 속에서 지향한다. 베트남 공산당의 공식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 '미래를 향해 과거를 닫는다'라는 선언을 이해하자면 첫째, '과거를 닫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 사안을 '비켜두는' 것이다. 중요한 정치적·역사적 사안을 당장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미뤄 놓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와 인민의 이익을 위한 베트남 공산당의 호 치 민사상이 가진 실용주의 노선에서 비롯한 것이다. 둘째, '비켜놓는' 것은 베트남인의 역사 인식에서 과거는 기억하는 것이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며, 잊거나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 선언은 베트남정부와 베트남인의 마음 한 곳에 과거의 유산을 담아놓는 것이다. 이 글은 '도이 모이' 선언과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한다'라는 역사인식 위에서 베트남 공산당이 민간인 학살과 같이 민감한 외교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밝혔다. 위령비문의 뒷부분이 연꽃무늬 대리석으로 덮여있는 이유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빚어진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에서 시민사회는 발전하지 못한 상태이고 공산당의 역사 인식과 외교정책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학살 문제를 외부에서 접근하는 한계 또한 명확하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쟁점이 새로운 논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피해자는 인민, 가해자는 군인으로 등치시키는 대립을 넘어서는 과거청산에 대한 보다 깊은 역사 인식과 철학적 사유를 필요로 한다.


This article explains Vietnam's historical perception of 'closing the past toward the future'(Khep lai qua khu, huong toi tuong lai) on issues surrounding the monument of Ha My in Vietnam. I used the testimonies of victims and veterans, field surveys, and documents to examine the construction of the monuments and the subsequent developmental process, as well as the position of the xa Dien Duong and the victims' families. I also analyzed the intervention of the Korean government and the adjustment process of the Communist Party of Vietnam. The conflict between the xa Dien Duong and the veterans, is still underway. The xa Dien Duong labeled the Blue Dragon unit as the perpetrator of the monument, while the veterans supported the victims' families and monument construction costs. Vietnam's historical recognition of 'Khep lai qua khu, huong toi tuong lai' and the Doi moi declaration, a reform and opening policy of the Communist Party, have a close internal connection. The principle of 'Khep lai qua khu, huong toi tuong lai' is not to negate or forget the past, but to orient the principle of peace and humanitarianism in the collective memory of the community in international relations. This paper explains how the Vietnamese Communist Party looks at sensitive diplomatic issues such as the civilian massacre on the basis of the declaration of Doi moi and the historical recognition that the past is closed and the future is coming. The reason why the back of the monument is covered with lotus pattern marble is also the result of this context.

KCI등재

9미국 소비주의 식생활양식의 역사적 변모 ― 대중미식문화의 출현을 중심으로

저자 : 송인주 ( Song In Joo )

발행기관 : 한국사회사학회 간행물 : 사회와 역사(구 한국사회사학회논문집) 118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07-356 (5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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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사회 미국에서는 20세기 말부터 푸디로 불리는 새로운 식도락자들의 선도 하에 원조 에스닉푸드 위주의 대중미식문화가 출현하는데, 그것은 기업식량체계가 제공하던 미국식 가정식생활에 내재된 구조적 문제가 대중적으로 인식되고 그 대안이 모색된 사회적·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먼저 편리한 과잉육식의 소비주의 식생활양식이 전국적으로 확립된 1960년대 중반에 반전·민권을 앞세운 사회적 소요와 반문화운동은 표준식단의 사회·생태적 문제점을 지적하며 기성 체제에 도전했고, 그 쟁점은 1970년대 동안 영양·건강·환경을 둘러싼 녹색소비주의로 발전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소비주의 생활양식의 내적 모순과 변화된 노동조건을 배경으로 전통적 가족생활이 해체되면서 더 편리하고 능률적인 식생활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 주요 농식품기업들은 소비자의 그런 요구를 발판으로 반문화의 문제제기를 선택적으로 수용·변용했다. 그 결과 1990년대 들어 대형 소매유통·외식기업의 주도 하에 지구적 적시공급망을 갖춘 더 현대화된 기업식량체계가 확립되었고, 이들이 식품시장을 장악하면서 오히려 미식문화가 싹틀 틈새들이 커졌다. 문화전쟁의 결론으로서 다문화주의는 그런 대중시장과 틈새시장을 연결하면서 진보주의 음식동맹을 주류화했고, 그 결과 문화잡식 지향의 대중미식문화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푸디이즘의 정치적 미식은 기업식량체계를 반대하면서도 그것에 의존하는 소비주의 성격과 동시에 급진적 주관성에 기초하는 소비자정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새 소비주의의 한계도 노정한다.


In the United States, from the end of the 20th century, under the guidance of new gourmets, called foodie, a popular gourmet culture emerged. It is the product of a social and historical transformation of American dietary standard. First, in the mid-1960s, when the consumerist over-meatified meals were established nationally, the counterculture movement raised questions about the social and ecological contradictions of such a diet, which developed green consumerism around health and environment. However, at the same time, traditional family life was dismantled in the background of changes in working and dietary conditions, thus demanding more convenient and efficient foodways. Agro-food corporations have selectively adopted and exploited the issue of counterculture based on the demand of consumers. As a result, in the 1990s, a more modernized corporate food system with a global JIT supply chain was established under the leadership of large retailers and franchise food chains. Gourmet cultures also grew in size. As a conclusion of the culture war, multiculturalism mainstreamed the progressive food alliance by linking mass food markets with niche food markets resulting in a cultural omnivorous foodie foodscape. However, the political gourmets of the foodieism lie in the limits of new consumerism in that they are oriented toward consumer politics based on radical subjectivity as well as consumerist characteristics that depend on it while opposing the corporate food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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