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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도부산 up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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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62)~40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362
항도부산
40권0호(2020년 08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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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산지역 4월혁명과 민주문학

저자 : 이순욱 ( Lee Soon-wook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31 (3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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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은 한국사회의 구조적 재편과 극적 전환을 마련해 준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문학의 좌표를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4월혁명문학은 이승만 정권과 비민주적인 가치 체계에 대한 단죄와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의식과 정치적 실천을 전면에 표출한 '힘의 선언'이자 피의 선언이었다. 혁명 당시 신문매체에서 지배적으로 생산된 시와 공론, 비평, 어린이문학, 청소년문학, 수기, 항쟁기 들은 그러한 정치의식의 적극적인 표명이었다.
부산은 4월혁명시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시민들의 정치적 실천이 가장 폭넓게 전개된 지역으로, 마산과 더불어 혁명의 열기를 전국적으로 확산한 4월혁명의 진원지이자 거점이었다. 이 시기 부산은 한국전쟁 이후 문화지형의 변화와 시민의식의 성장, 청년학생운동 조직의 결성과 활동, 국가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은 언론 방송매체의 공론장 형성과 적극적인 여론 주도 들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4월혁명문학을 주도할 수 있었다.


Busan had been one of the most critical domains for producing, distributing and consuming pieces of the April Revolution Literature based on the spirits of democracy and resistance. Most the poems, public opinions, juvenile works, records of protest events, and crticisms which had been put on the public math media of Busan area such as the Busan Ilbo, the International Newspaper, and the Democratic Newspaper, were full enthusiasm for resistance movements against the Li SeungMan Government. The reason why Busan literature in the period of April Revolution took the lead of journalisms and literary criticisms against the state power seems due to the rich heritage of politics of literature which had been accumulated throught daily experiencing ideology struggles in the province since the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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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마민주항쟁의 역사적 의의 - '4·19의 길'과 '5·16의 길' 사이에서 -

저자 : 차성환 ( Cha Seong-Hwa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3-65 (33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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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부마항쟁이 한국현대사라는 거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그 기준으로서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4·19의 길'과 '5·16의 길'의 대결로 파악하는 관점을 가설로 설정한다. '4·19의 길'이란 민중이 중심이 되어 민주주의, 민족자주, 평등, 인권, 남북 평화, 통일 등을 지향하는 노선이며, '5·16의 길'이란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권위주의, 친미, 반공, 반북, 효율성, 성장주의 등을 지향하는 노선이다. 이 두 개의 길은 적어도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로 대결, 경쟁, 길항하면서 진화, 발전해 왔다고 본다. 그렇게 볼 때, 부마항쟁은 이 두 가지 길 중 '5·16의 길'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던 유신체제에서 그 상황을 극적으로 반전시킴으로서 질식 상태에 있던 '4·19의 길'을 극적으로 되살려낸 사건이다. 유신체제 하에서 박정희는 국가의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5·16의 길'이 지향하는 목표로 매진했고 전 국민을 유신이데올로기(한국적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도록 교육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교육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박정희에 대한 숭배와 찬양은 대체로 이 시기에 배양된 것이다. 이 시기에는 민주주의와 인권 등 '4·19의 길'이 추구한 가치는 폄하되었고 4·19의 기억 자체도 무관심과 망각 속에 묻으려 했다. 하지만 1960∼70년대 전 시기에 걸쳐 끊임없이 지속된 민주화운동, 민중운동의 크고 작은 흐름들은 마침내 부마항쟁이라는 거대한 화산으로 폭발하면서 10·26사건이라는 여진을 만들고 박정희의 사망을 통해 유신체제를 붕괴시켰다. '4·19의 길'이 다시금 '5·16의 길'을 밀어내고 역사의 주류로 등장하는 것은 부마항쟁과 10·26 이후 등장한 최규하 과도정부하에서 모든 언론과 정치세력이 민주화를 내걸었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새로운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적어도 그 이전까지는 어떤 세력도 민주화를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로 수용하게 되었던 것은 부마항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마항쟁은 4·19의 길을 기사회생시켰고 신 군부가 이를 뒤집었지만 5·18항쟁과 6월항쟁을 통해 다시 뒤집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는 거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This paper attempts to consider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BUMA democratic uprising in Macroscopic viewpoint namely viewpoint of Korean contemporary history. So I formulate hypothesis that Korean contemporary history is understood by confrontation between 'The road of April 19 Revolution' and 'The road of May 16 Coup'. 'The road of April 19 Revolution' is the political line to pursue democracy, national autonomy, equality, human rights, peace and reunification of South-North Korea around people. 'The road of May 16 Coup' is political line to pursue authoritarianism, pro-Americanism, Anti-communism, Anti-North Korea, adherence to efficiency and economic growth around strong leader. Two roads have evolved and developed through mutual confrontation, competition from 1960s to the present. BUMA democratic uprising is a dramatical historic event that revived 'The road of April 19 Revolution' by reversing the situation under the overwhelming 'The road of May 16 Coup', Yushin regime. Under Yushin regime, President Park concenturated political power to achieve the goal of 'The road of May 16 Coup'. All educational institutions taught Yushin ideology(democracy of korean type) to the whole nation. This ideological education showed considerable effect. Worship and praise for President Park were taught under Yushin regime. Yushin regime diminished the value of democracy and human rights of 'The road of April 19 Revolution' and oppressed the memory of April 19 Revolution. But all democratic movements and popular movements of 1960s and 1970s were joined BUMA democratic uprising that explored like an eruption of a volcano and caused 'October 26 incident'. Yushin regime was collapsed by death of President Park. 'The road of April 19 Revolution' made an entrance as mainstream of South-Korean history. Under the interim government of President Choi kyu-hah, all medias and political parties asserted democratization. Democratization was general trend of the period that anyone could not denied. Though New Army Group staged a new coup, BUMA democratic uprising formed the basis that could turned military rule over through 5·18 People's Uprising and June Democracy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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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과 부림사건의 현재적 의미

저자 : 정승안 ( Jung Seung-a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67-105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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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생운동은 사회변혁운동과 정당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다. 특히 1980년대는 이른바 '학생운동의 시대'였다. 학생운동사에 대한 연구는 한국사회민주주의와 사회운동의 구조 및 동학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당대의 시대정신을 밝히고 우리시대 민주주의의 성찰적 재구축의 가능성과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여기서는 80년대 학생운동의 흐름과 부림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조명한다. 학생운동에 대한 이론적 논의들과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흐름을 살펴보고, 부림사건의 운동사적 의미와 배경에 주목한다. 그리고 부림사건을 통해 오늘날 학생운동에 던지는 몇 가지 함의를 짚어볼 것이다.
일반적으로 학생운동이란 학생들이 교내의 다양한 문제들이나 정치사회적 문제나 쟁점들에 대해 조직적으로 대응하는 활동을 지칭한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단절된 한국의 학생운동이 전국적 조직을 지향하며 대중적 사회운동의 주축으로 등장하는 1980년대를 전후한 시기가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시작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80년대 초반의 정세와 광주항쟁에 대한 평가에 따른 다양한 학생운동내의 논쟁들로 이어진다. 이른바 무림-학림이 그것이다. 전국민주주의학생연맹-학림사건의 수사과정에서 발단이 되어 부림사건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부림사건 당시 부산지역의 민주화운동은 체계적으로 진행되지는 못했다. 비록 부림사건이 조직화된 준비와 결의에 의한 결과물은 아니었고, 권력의 조작과 억지에 의해 구성되었다지만 결과적으로 부산지역의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자생적으로 형성되던 부산지역의 학생운동 세력들이 부림사건을 계기로 다양하게 분화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전개되는 부산지역의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운동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회운동의 새로운 조직화에 대한 성찰들도 뒤따랐다. 특히 부림사건의 흐름을 따라 가다보면, 학생운동의 선도성에 대한 인식과 자각 그리고 훈련된 활동가들을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의 배출했다는 학생운동의 주요한 일반적인 논거와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학생운동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 지점이다.


The student movement in Korea had a great influence on social transformation and politics. In particular, the 1980s was the so-called "era of student movement." The study of student movement history explains the structure and dynamics of Korean social democracy and social movement. And it is significant in that it can reveal the spirit of the times and explore the possibility and direction of the reflective reconstruction of democracy in our times.
Here, I would like to highlight the flow of the student movement in the 80s and the meaning of the 'Burim-incident'. Theoretical discussions on the student movement and the flow of the student movement in the early 80s will be examined, and attention will be paid to the exercise history meaning and background of the 'Burim-incident'. And through the Bourim-incident, we take a look at some of the implications of today's student movement.
In general, student movements refer to activities in which students systematically respond to various problems or political or social issues on campus. It would be fair to say that the period around the 1980s, when Korea's student movement, which was cut off through the Korean War, emerged as the mainstay of the popular social movement toward a national organization, was the beginning of a full-fledged student movement.
The situation in the early 1980s and the evaluation of the Gwangju Uprising led to various debates within the student movement. That's what the so-called 'Moorim-Hakrim'. The "National League of democratic students"-“Haklim” case was initiated during the investigation process and the Burim case was created. However, the Busan pro-democracy movement was not carried out systematically That days. Although the Burim case was not the result of organized preparation and resolution, it was composed of the manipulation and coercion of power. As a result, the Burim-incident became a symbolic event for the student movement and the pro-democracy movement in Busan.
Students' movement forces in Busan, which had been formed spontaneously, began to differentiate themselves in the wake of the Burim-incident. It has had a profound impact on the entire civil society movement as well as the student movement in the Busan area. Reflections also followed on the new organization of social movements. In particular, following the trend of the Burim-incident, one can see that it is in line with the main general argument of the student movement that the awareness and awareness of the initiative of the student movement and the production of trained activists as members of the civil society. This is a point that needs to be noted in today's student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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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從拔城)'과 고대 부산

저자 : 백승옥 ( Beack Seoung-ok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07-14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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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광개토태왕릉비문 경자년(400)조에 보이는 '任那加羅'를 남가라(=가락국)임을 고증하고, 그 從拔城의 위치를 현 부산광역시 연제구와 수영구에 위치한 배산성(盃山城)과 그 주변 일대로 비정하였다. '任那'에서의 '任'은 '남쪽(南方)'을 가리키는 말임을 『史記』, 『漢書』, 『後漢書』, 『晉書』 등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대 중국인들의 '任'='南方' 인식은 고구려인들도 학습을 통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능비문의 찬자가 '任那加羅'라 한 것은 '남쪽에 있는 加羅'를 의미하고 서술한 것으로 보았다. '安羅人戍兵'에 대해서는, '羅人을 안치하여 지키게 하였다'로 해석하였다. 羅人은 신라인이 아니라 고구려 군대로 보았다. 고구려군이 성을 정복한 후 그들의 군대를 주둔시킨 것으로 본 것이다.
고대 부산 지역은 신라와의 접경지였다. 따라서 신라와는 언어와 문자, 생활습속 등에서 매우 유사했다. 이러한 양상은 고대 부산 지역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보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6세기 전반 대까지 조영된 연산동고분군은 당시까지도 부산에는 독자성을 가진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부산의 가야 세력이 신라에 복속된 시기는 6세기 전반 이후의 어느 시기일 것이다.


This paper ascertains Imnagara(任那加羅) in the great king Gwanggaeto's tombstone inscription in Gyeongjanyeon 400 is Namgara(=garakguk) and defines the location of its Jongbalseong(從拔城) to district of Baesanseong(盃山城) located in Yeonsan-dong, Yeonje-gu, Busan. It is confirmed that 'Im(任)' in 'Imna(任那)' means South(南方) through 'Sagi (史記)', 'Hanseo(漢書)', 'Hoohanseo(後漢書)', and 'Jinseo (晉書)'. It was believed that the people of Goguryeo were fully aware of this perception of 'Im(任)'='South(南)' by the ancient Chinese. This paper saw the editor of epitaph meant 'Gara(加羅) in south' when it said Imnagara(任那加羅). Regarding 'Anrainsubyeong(安羅人戍兵)', it was interpreted to enshrine 'Rain(羅人)' to keep it safe. Rain(羅人) was not seen as the army of Silla(新 羅), but as the army of Goguryeo(高句麗). It was seen that the Goguryeo army had conquered the castle and had their army stationed.
The ancient Busan area was a border with Silla. Therefore, it was very similar to Silla in language, text, and daily life. It was also the reason why this ancient Busan area was often regarded as to be subjugated to Silla. However, the Yeonsandong Tumulus Cluster, which was established until the early 6th century, proves that there was a unique group in Busan until then. The period when Busan's Gaya forces were brought into Silla would be sometime in the early 6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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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다대포첨사 윤흥신의 임란(壬亂) 사절(死節) 경위와 조선후기의 현창

저자 : 이민웅 ( Lee Min-woong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43-16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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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초기의 다대포첨사, 윤흥신은 조선전기 대표적인 훈척 가문인 파평윤씨로 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의 다섯째 아들이다. 을사사화의 여파로 공신의 노비가 되었다가 32년 후에 신분을 회복하였다. 이후 그는 몇몇 관직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직전에 다대포첨사가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첫날, 다대포성을 공격해온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것은 임진왜란 전투 첫날 거둔 승전으로 그 역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 그는 이튿날 임지를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사절(死節)은 몇 가지 이유로 후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18세기 중엽 동래부사와 경상감사를 지낸 조엄은 이 사실을 알고 조정에 포상을 건의하였다. 조엄 당대에 윤흥신의 충렬사 추가 배향이 이루어졌다. 그의 손자 조인영 대에는 윤흥신 순절비가 세워졌다. 이러한 조엄 가문의 3대에 걸친 윤흥신 현창사업은 주목받을 만하다. 한편 조정 차원에서도 선무원종공신 1등 책봉, 정려와 병조참판 증직, 충렬사 추가 배향 등 현창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During the early stage of the Imjin Waeran, 다대포첨사(Dadaepo Chumsa) Heung shin Yoon was born as the fifth son of a famous family of the Papyung Yoo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especially Yoon Im who was the aunt of King In Jong. After his family suffered a downfall due to the Ulsa calamity, he regained his status after spending 32 years as a servant.
And after holding various government posts, he became the Dadaepo Chumsa just before the Imjin Waeran. On the first day, he defeated the Japanese forces at the Battle of the Dadaepo Castle and this is historically important as it is the first victory of the Imjin Waeran. He died on the second day while defending his post.
His honorable death was not known until the 18th century for several reasons. When Cho Um, who was the 동래부사(Dongrae Busa) and 경상감사(GyeongSang Gamsa) during the mid 18th century, found out about this, he requested a reward to the Imperial Court. During Um's time, sanctuaries were built in honor of Yoon along with additional stone monuments in In Young Cho's time, who was the grandson of Um. The effort that lasted for three generations of Um's family to honor Yoon is worth noting.
On the other hand, the Chosun Imperial Court was doing its work of honoring the dead by providing 선무원종공신 1등 책봉(Sunmoo Wonjong Gongshin), 병조참판 증직(Byungjo Champam), and building additional sanctu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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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19년 통신사행과 국서

저자 : 임영현 ( Im Young-hyeo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9-208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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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요시무네[吉宗]가 관백의 지위를 세습한 것을 慶賀하기 위하여 파견된 1719년 통신사행의 파견 과정, 그리고 사행을 통하여 교환한 조선과 일본의 국서에 대한 연구이다.
1719년 사행을 위한 조선과 일본의 교섭 과정, 조선에서 이루어진 준비 과정을 시계열적으로 검토하였다. 이어서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은 국서·별폭의 양식·제도와 실제를 살펴보았다. 이전의 연구가 통신사의 일본 노정과 일본에서의 교류에 집중했다면 본고는 조선에서 이루어진 준비와 일본과의 교섭 과정에 주목한 것이다. 그 결과 1719년 사행은 1682년 사행 사례로 복귀하면서도 1711년 사행 당시 새롭게 도입된 일부 사례를 적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1719년 국서와 별폭은 지침서의 양식과 일치하지만, 별폭 예물의 물목과 수량은 일본의 요청에 따라 물종과 수량에 변화가 있었다. 또한 국서가 개인이 작성한 문헌에 수록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국왕의 국서는 통신사가 副本을 지참하였고, 일본 관백의 회답국서는 통신사가 받은 후 미리 열람할 수 있었기 때문임을 밝혔다.


This study examined the dispatch process of delegations and the credentials exchanged between Joseon Dynasty and Japan in 1719.
The process of negotiation between Joseon and Japan for the visit in 1719 and the preparation process in Joseon were studied in time series. Next, the form system and practice of the addendums of credentials exchanged between Joseon and Japan were examined. If the previous studies focused on the itinerary of delegations and exchanges in Japan, this study focused more on the preparation process for the negotiation in Joseon. Resultingly, it was found that the visit in 1719 was a return to the rules and regulations of the visit 1682 but it also applied some of the newly introduced cases during the visit in 1711. Moreover, even if the form of the credentials and addendums in 1719 was followed, there were changes in the type and quantity of the articles of addendums prepared for a present upon request by Japan. This study also found out that the reason that the credentials could be included in the literature written privately was because the delegations brought the copies of the credentials of the King of Joseon and they could receive and read the letter of reply from the Japanese authorities in adv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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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10년대 경남 지역 은사수산사업의 운영 - 동래군을 중심으로 -

저자 : 선우성혜 ( Sunwoo Sung-hye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09-2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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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10년대 경남지역 은사수산사업의 운영을 동래군 중심으로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한일합방 직후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하사된 임시은사금이 공채로 발행되어 조선의 각 지방에 배여되었다. 1910년 경남지방에 배당된 은사금은 1,606,000원으로 1914년 지방 행정구역의 정비가 완료되는 시점에는 1,577,700원이 책정되었다. 이는 다시 경남의 각 부군도에 배여되었는데 동래군에는 68,500원이 배여되었고 이중 5%인 3,425원을 기금이자로 하여 수산사업을 진척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배여된 금액은 동래 지역에서 이루어진 농업, 잠업, 機業, 水産, 축산 등 각종 수산사업과 공립보통학교의 보조비, 흉겸비 등으로 사용되었다.
동래 지역에서 이루어진 은사수산사업은 농사장려, 수산장려(水産獎勵), 양잠장려, 기업장려(機業獎勵) 등이었다. 농사장려는 주로 순회교사, 마령서종배부, 감저묘배부, 비료종자배부, 농구제조전습 등이었다. 잠업장려는 원잠종제조 및 잠종제조자 양성ㆍ잠종배부·상묘배부(桑苗配付) 등이었다. 기업장려(機業獎勵)의 경우 위탁전습소ㆍ순회지도ㆍ이업원료구입 등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은사수산장으로 동래기업전습소가 운영되었다. 수산장려(水産獎勵)의 경우 주로 경상남도가 주가 되었고 경우에 따라 위탁경영 하였는데 어로전습 및 鰮窄粕製造傳習이 있었다. 그 이외 축산장려로 種鷄배부가 있었다.
동래군과 관계된 은사수산사업의 운영을 보면 잠업장려는 정책의 의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 농가 경제의 향상을 위한 잠업장려가 도리어 농가에 비용을 전가하게 됨에 따라 외면 받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수산장려(水産獎勵)의 경우 그 자체로 전습생의 호구지책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기업전습(機業傳習)의 경우 은사수산장인 東萊機業傳習所의 운영이 대표적으로 가마니 제조가 주였다. 특히 1910년대 가마니의 공급부족과 가격 인상 등으로 가마니 제조는 부업장려로 적극 권장되는 유망업종이었다. 따라서 동래군과 관계된 여타의 전습소보다 안정적으로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The objective of this study was to contemplate the operation of industry based on temporary royal grant fund in South Gyeongsang province in the 1910s focusing on Dongnae county. Immediately after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temporary royal grant fund under the name of the Japanese Emperor was issued and distributed to each district of Choseon. The royal grant fund distributed to the South Gyeongnam province in 1910 was 1,606,00 won and by the time the organization of local administrative districts was completed in 1914, it was appropriated as 1,577,700 won. This was again distributed to each Bugundo of Gyeongnam and 68,500 won was allocated to the Dongnae-gun, of which 5% corresponding to 3,425 won was used as fund interest so as to make progress in fishing business. Such distributed amount was used in various marine business including agriculture, sericulture, textile manufacturing, fisheries, livestock industry, etc. fulfilled in Dongnae area, and subsidies for public ordinary schools, funds for ruined farming, etc.
If you take a look at the development of temporary royal grant fund in relation to the Dongnae-gun, there was also an aspect for the promotion of sericulture in which the intention of the policy failed to reflect the reality. The promotion of sericulture for enhancement of farming household economy resulted in the occurrence of situation of being neglected as, onthe contrary, it passed on the expense to the farming households. For the promotion of fisheries, it in itself was helpful to some degree to the means of livelihood of students of vocational education. In case of textile vocational education, manufacturing of straw bags were dominated for the operation of Dongnae textile vocational education based on temporary royal grant fund. Particularly in 1910, manufacturing of straw bags was highly recommended promising business as promotion of extra business due to short supply and price increase, etc. Therefore, it seems to have been operated more stable than other vocational education center in relation to Dongnae-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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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20~1930년대 낙동강 하류부의 일천식하천개수공사와 지역민의 대응

저자 : 고나은 ( Ko Na-eu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239-279 (4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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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하천개수사업의 시행을 통해 낙동강의 환경 개선을 도모하였다. 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구간은 홍수의 피해가 심한 평야 지역인 낙동강 하류부였다. 일제 당국은 이 구간의 일천식하천개수공사를 통해 몽리구역의 증가와 구역 내의 방·배수, 생산 증진 효과를 기대하였다.
이러한 식민지적 개발은 이 지역 일본인 지주들과 일부 조선인 유력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하층 농민들은 극심한 수해와 개발로 인해 일상적 이해관계의 충돌, 더 나아가서는 생존의 위협을 겪어야만 했다. 또한 식민지적 하천 개발이 가져온 수혜는 민족별·계층별로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었다. 이러한 불평등은 식민지 권력과 지역사회, 지역사회 내 지역민 간의 대립과 갈등을 유발하였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개인적·집단적으로 정치적인 움직임을 취했다. 다양한 진정 운동과 기성회의 결성, 군민대회의 개최 등을 통해 식민지 권력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정책 및 지역 내의 이해관계 획득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갔다. 이렇듯 사업별·지역별로 생겨난 중층적 이해관계들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교차점에서 지역정치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지역정치에 참여하는 지역민들의 다양한 대응방식은 일종의 근대를 체화해 나가는 경험의 장이 되고 있었다.
일천식공사와 그로 인한 지역사회의 변화는 지역의 경관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다. 변화가 가져오는 다면적 이해관계에 저항하는 과정이 지역사회의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촉발시켜 도시뿐 아니라 농촌 지역 주민들의 일상도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Joseon planed to environmental improvement on the lower Nakdonggang River with the river improvement project. There are two major objectives of the project: consulting convenience of Japanese landowners and a part of local influentials of Joseon in that area; promoting its results as a tangible achievement for maintaining the governing authority.
However, the lower class of that district had to suffer a numerous conflict of interests caused severe flood damages and forced developments during the project, which possibly led to life-threatening situation in many ways. The benefits from the river improvement project had been unevenly distributed by classes or nationals, causing conflicts not only among the colonial authority and the local community, but also between locals within the community.
In order to gain profits and to protect themselves, the locals seek to respond collectively and politically. Therefore, the river improvement project eventually sparked a series of protests stemmed from politics of everyday life, in which local residents could embody the modernity in the course of resistant movements against the project and the auth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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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한국전쟁 당시 유엔 참전국 중 최대 규모의 병력을 파병한 미국이 어떠한 배경에서 대다수의 자국 전몰장병들을 1951년 1월에 건립된 유엔묘지에 안장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주요 배경으로 한국전쟁기에 미군이 최초로 작동시킨 '미군 전사자 유해의 전시 중 동시 송환 정책'과 그 일환으로 일본 항도 고쿠라(小倉)에서 실시한 전사자 신원 확인 과정을 고찰하였다. 이는 거시적 관점에서 유엔군을 주도하던 미국의 군사정책과 전쟁의 후방기지였던 일본에서의 미군 전사자 신원 감식, 그리고 유해가 본토로 송환되는 흐름을 연계시켜 추적하려는 시도이다.
연구 방법으로 미 군사 문헌과 참전군인 기록, 미군 중심의 유엔군 전사자 신원확인을 담당했던 일본 인류학자들의 논문을 다각도로 논고함으로서 미국, 일본, 국내에서 이루어진 기존 연구 간의 공백을 보완하며 전체상을 조망하였다. 특히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고쿠라 부대의 신원 감식 및 송환 사료(史料)를 국내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연구 결과 본고는 1951년 미군이 도입한 전시 중 동시 송환 정책이 자국 전사자를 같은 시기에 조성된 유엔묘지에 안장하지 않은 핵심 단서임을 제시하였고, 한국전쟁이 본 방침을 미 군사상 최초로 출범시킨 역사적 전환기가 되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무엇보다 현재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일부 유엔군의 유해가 고쿠라에서 신원 확인을 거쳤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전사자의 가매장과 발굴, 이송과 감식 등 제반 경위를 고찰하는 작업은 초기 유엔묘지 조성 배경의 일단을 규명하는 데 주효하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유엔기념공원은 부산뿐 아니라 한국전쟁기 한반도 전역에 걸친 전투 흐름과 미 군사 정책, 일본 항만 간의 복합적인 역학관계와 맞물려 생성된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하여 본 연구는 지역 차원에서 항도부산에 소재한 유엔기념공원의 기원과 더불어 국제 전쟁사의 중요한 장(章)을 규명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This study addresses the research question of why the United States (US), which dispatched the largest number of United Nations (UN) combatants during the Korean War, did not bury its war dead at the UN Cemetery in Tanggok, near Busan. The research is an outcome of tracking back to the identification process of the US soldiers at the Kokura port of Japan, aligned with the US policy of Concurrent Return of the bodies of the fallen soldiers. In a broad sense, it is an attempt to make a trilateral link among the evacuation process conducted in the Korean Peninsula, the identification of the American soldiers in Japan as a rear base of the war, and the flow of repatriation of US war dead to their homeland.
Through carrying out the multi-archival analysis of the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documents, United Nations Archives and Records Management Section (UNA) historical reference, US military articles, veterans' records, and Japanese anthropologists' paper, this study is believed to fill the gap in the existing studies. Furthermore, it examines the overall status of the research conducted in the US, Japan, and Korea. In particular, this research would be the first notable work to introduce the identification process held in Camp Kokura in the academic disciplines in Korea.
Research findings illustrate that the US military's policy to repatriate remains during wartime operations was a pivotal clue to the UN Cemetery and that the Korean War was a crucial turning point in the military history of the US. Therefore, the research concludes that today's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 is a by-product created at the intersection of US military policy and Japanese ports under the influence of the multilateral dynamics of the conflict. Marking the 70th anniversary of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this timely study is expected to lay a foundation for the origin of the UNMCK located in Busan.

KCI등재

10한국전쟁기 부산 화가들의 지역성 모색 - '바다' 이미지를 중심으로 -

저자 : 김정선 ( Kim Jung-sun )

발행기관 : 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간행물 : 항도부산 4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11-340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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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미술에서 '바다'는 삶의 일부이자 주요한 주제였다. 근현대기 부산을 중심으로 활약한 임호, 김종식, 김경을 비롯해 한국전쟁기, 피난처 부산의 바다를 배경으로 다수의 화가들이 붓을 들었다. 본 소론은 근대 이후 부산을 배경으로 제작된 이러한 바다 이미지를 축으로 부산 미술의 지역적 특색을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이후 바다는 전통적인 만경창파의 관념이나 지리적 개념에서 벗어나 내면을 투영하는 새로운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논고에서는 이처럼 단순한 풍광을 넘어 '바다'가 지니는 의미를 고찰하고, 나아가 한국전쟁기 지역 화가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추적하는데 목적이 있다.
실제 김환기, 장욱진 등 신사실파를 중심으로 한 외지 화가들이 바다를 통해 전쟁의 참상에서 벗어난 탈속의 낙원을 발견했다면, 1953년 토벽동인을 결성하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색하고자 고민했던 부산 화가들에게 '바다'는 암울한 삶의 표상이자, 토박이와 외지인을 구분하는 경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박한 유행을 쫓기보다 부산만의 토질적인 특질을 작품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이러한 화가들의 의지는 전후 부산화단의 서정적인 향토 풍경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전쟁기의 처절한 삶의 공간에서 맑고 투명한 고향의 풍광으로 변모되는 바다이미지는 언뜻 상반된 것처럼 보이나, 가식 없는 진실과 우리의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부산 서양화 1세대들의 고심의 흔적이기도 했다.


The sea in the Busan art has been at once part of its life and a major theme. Including Im Ho(임호), Kim Jong-sik(김종식), and Kim Gyeong(김경) who centered their career on Busan during the modern and contemporary period, a number of painters wielded their brushes while putting in the background the port city as a refuge during the Korean War. And their paintings often include those women who carved vibrant vitality out of the sea.
In this essay, I'd like to explore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of the Busan art by focusing on the figure of women which was set in Busan since the modern era began. For 'the sea and women' at once makes a universal theme grounded in the matrix and taps into the identity of the city's painting community.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get as close as possible to the independent voice of the first-generation painters, who organized exhibitions for the members of their artistic coterie and thereby aimed to realize the local colors peculiar to the city's painting community.
Meanwhile, We find not only the uniqueness of the artists but also the local traits shared by the regional artists in the works not only of Kim Jong-sik and Kim Yun-min who were members of Tobyuk-Group, but also of Yang Dal-seok who worked for a long time in Busan. While their themes and painting styles were different, the tendency among the first-generation Busan painters that tried to express the world beyond the reality mainly with bright colors and representation shown in their works was the outcome of their effort to "find the archetype of the unaffected and truthful national art that percolates from the physiological body odor of our people" instead of pursuing the light-minded trends, even though it was shock coming from out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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