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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Journal Stadies of Dong Hak

  • : 동학학회
  • : 인문과학분야  >  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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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간
  • : 1598-7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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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2000)~49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505
동학학보
49권0호(2018년 1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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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원주지역의 동학 포교와 원주 출신 동학인의 동학농민운

저자 : 조규태 ( Kyutae Cho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49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7-46 (4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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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강원도 원주지역의 동학 전파와 원주 출신 동학인의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연구이다. 먼저 최제우와 최시형이 교주로 활동하던 시기, 강원도 원주 출신 인물의 동학 수용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기 원주 출신 동학인의 강릉·홍천 등 강원도에서의 동학농민운동과 그 성격에 대해서 알아보고, 충청도에서 벌인 활동에 대해 검토하였다.
강원도 원주인으로 처음 동학을 수용한 사람은 장기서였다. 그는 1860년대 후반 영월에 유배 와 왔던 이경화를 통하여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1871년 '이필제의 난' 이후 최시형 등 동학 지도부의 인물들이 강원도에 피난을 와서 경전을 간행하고 포교를 확대하자, 원주지역에도 점차 동학이 확산되었다. 1890년대 초 강원도 원주에는 임순호, 이원팔, 이화경, 신택우, 김화보, 이규하, 이종태, 임명화, 임석화 등이 교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강원도 원주의 동학인들은 1894년 음력 8월 20일 경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항거하며 봉기하여 음력 9월 4일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고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부의 동학인들은 최시형, 손병희와 함께 충청도 우금치 등지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동학농민운동 후 원주의 동학인들은 최시형과 손병희 등 동학 지도부의 인사들이 원주에 와서 은거하며 포교활동을 하는 것을 도왔다.
1898년 최시형의 사망 후 원주이 동학인들은 대체로 손병희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1904년 원주의 동학인들은 진보회를 설립하고 소위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소위 갑진개화운동 시 원주의 동학인들은 진보회를 설립하고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This article is about the spread of Donghak in Wonju, Gangwon-do, and the Donghak Peasants' movement of natives of Wonju. After reviewing the spread of Donghak into Gangwon-do during Choi Je-woo and Choi Si-hyung of Donghak leader, I reviewed about the acceptance of Donghak by a person from Wonju. Then, I examined the activities of Donghak believers from Wonju in Kangwon-do such as Gangneung and Hongcheon, and them in Chungcheong-do such as Gongju.
It was Jang Ki-Seo that accepted Donghak first as a native of Wonju. He believed Donghak in the late 1860s through Lee Gyeong-hwa, who had been in exile in Yeongwol. Then, after the “Lee Pil-je's Rebellion” in 1871, Choi Sihyung and other leaders of Donghak came to Gangwon-do and published the Donghak Bible and expanded the missionary work. In the early 1890s, Im Soon-ho, Lee Won-pal, Ewha Womans, Shin Taek-woo, Kim Hwa-bo, Lee Gyu-hwa, Lee Jong-tae, Im Myung-hwa, Im Seok-hwa, and others worked in Wonju.
Donghak Believers in Wonju occupied Gangneung-bu on September 4 with Donghak Believers of Kangwon-do, protesting the occupation of Gyeongbok Palace by the Japanese army on August 20, 1894. Some of the Donghak Believers from Wonjufought in Ugeumchi, Chungcheong Province.
After the Donghak Farmers Movement, Donghak believers from Wonju contributed the leaders of Donghak as Choi Si-hyung and Son Byung-hee to hide and engage in missionary work in Wonju. After Choi Sihyung's death in 1898, Wonju Donghak believers supported Sohn Byunghee in general. And in 1904, the Donghak believers of Wonju founded the Jin-bo-hoe and launched a movement for civilization in 1904, socalled “the Gap-jin Gae-hwa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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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원주 동학농민혁명사 전개 과정과 문화 콘텐츠 활용 방안 연구

저자 : 채길순 ( Gilsoon Chae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49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47-7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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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원주지역의 동학 및 동학농민혁명사의 전개과정을 살피고, 문화 콘텐츠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데 있다.
연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주지역에 동학이 일찍부터 유입되어 동학교도가 많았고, 동학농민혁명 시기에는 이들의 투쟁이 두드러졌다. 특히 원주지역에는 한석룡 김화보 장우근 박삼석 김기순 김진해 김점복 손재규 안재풍 등 동학지도자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공주취회, 광화문복합상소, 보은취회와 같은 교조신원운동에 주도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시기에 투쟁이 치열했으며, 토벌 시기에는 인명 피해가 켰다.
현재 원주 지역 동학농민혁명사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원주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원주군청 홈페이지에 동학 관련 소개가 없고, 관광지도에는 동학농민혁명사 관련 유적지 소개가 없다. 이에 비해 정읍시청, 고창군청, 남원시청, 보은군청 등 홈페이지에는 동학농민혁명사 관련 역사와 유적이 다양하게 폭넓게 소개되어 있어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원주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에 대한 저변 확대를 위해서는 향토사학 연구가 선행되어야하며, 홈페이지에 자료를 올려 지역 주민과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문화콘텐츠 구축 단계는 ① 문화콘텐츠 계획② 기본 사료 수집 정리 ③ 문화콘텐츠 구축과 홍보 단계로 정리 된다.
원주지역 동학농민혁명사 문화콘텐츠 활용 방안은 첫째, 지역 역사 연구 결과를 시청 홈페이지에 탑재하고, 기왕에 건립된 시설에 대한 소개와 함께, 새롭게 알려진 사적지에 대한 안내 표지판이나 표지 석을 설치해야 한다. 이에 대한 사례는 미흡하나마 동학농민혁명의 중심 지역이라 할 정읍시청, 고창군청, 남원시청, 보은군청의 문화콘텐츠 활용이나 홈페이지를 참고할 만하다.
이 연구의 결과에 대한 기대효과는 문화콘텐츠의 지역적인 특성화이다. 예컨대 일정한 테마를 세워 원주 송골에서 여주나루까지 '최시형 고난의 길 체험 둘레길' 제정, 동학유적 관광지도 제작, 지역 역사에 대한 리플렛, 스토리텔링에 따른 만화 및 동영상 제작, CD매체 제작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 활용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In Wonju area, Donghak had been introduced earlier with many believers and their struggles were remarkable during the period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Especially, the activities of Donghak leaders were outstanding in Wonju including Suk Ryong Han, Hwa Bo Kim, Woo Gun Jang, Sam Suk Park, Ki Soon Kim, Jin Hae Kim, Jum Bok Kim, Jae Kyu Son, Jae Poong An, and so on. They leaded Founder's Remission Movements such as Gongju Assembly, Gwanhwamun Joint Appeal, and Boun Assembly. Hence, struggling was serious during the period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casualties were significant during the suppression period. To date, few studies on the histories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Wonju had been conducted, so little was known on the history.
 Hence, no introduction related to Donghak was found in the homepage of Wonju County Office and no introduction on the historical site related to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in the travel map. In contrast, a variety of histories and historical site introduction related to Donghak Peasant Revolution were established in the homepages of Jungeup City Hall, Gochang County Office, Namwon City Hall, and Boun County Office. To expand the base on the history of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Wonju, studies on the local history should be preceded and the data should be uploaded in the homepage so as to share the information with the local inhabitants. Developmental steps of cultural contents can be summarized as 1) planning of cultural contents 2) collection and summary of basic historical records, and 3) development and promotion of cultural contents. Utilization plans of cultural contents on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Wonju are first to upload the study outcomes on the local history in the homepage of City Hall and to establish the signboards or signing stone on the newly known historical sites together with introduction of existing facilities. Related cases can be referred to the cultural contents utilization or homepages of Jungeup City Hall, Gochang County Office, Namwon City Hall, and Boun County Office. The core of the cultural contents is characterizations of the region. For example, various plans of cultural contents utilization should be prepared such as establishment of 'experiencing tracking road of Shi Hyung Choi's road of hardships' from Songgol to Yeoju port upon making some themes, developments of Donghak travel map, leaflet on the history, cartoon and animation by storytelling, CDs, and s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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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월 최시형의 피신과 교단 수습

저자 : 성강현 ( Kanghyeon Sung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49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73-10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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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외세를 목적으로 9월에 총기포한동학농민군은 공주 점령을 위한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고 연패를 거듭하다 태인전투 후 호남과 호서의 동학군은 분리하였다. 전북 임실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시하던 동학교주 해월 최시형은 호서동학군, 소위 '북접군' 지휘부인 손병희를 만나 관군과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전라도에서 충청도, 경기도를 거쳐 강원도 인제로 피신하는데 성공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로 인해 동학교단은 존폐의 위기에 처하였으나 해월은 강원도와 경기도 등지에 은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와해된 교단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895년부터 1898년 4월 체포될 때까지의 약 4년간 해월은 동학 재건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 활동으로는 첫째, 첫째, 교인들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인력으로 된 일이 아니라 천명에 의한 사건이라고 규정하여 공과에 대한 논쟁을 불식시키고 교인들의 단합을 꾀하였다. 둘째, 결국 1897년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여 교단을 책임지웠다. 셋째, 동학의 새로운 포덕 대상지로 동학농민혁명의 피해를 입지 않은 평안도와 황해도 등 북부 지방을 삼아 교세를 확장시켰다. 넷째, 동학 교리의 정립에 기여하였다. 해월이 이 시기에 설파한 법설은 이후 동학의 의식과 교리 정립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食一碗)'의 법설은 동학의 생명사상을 대표하는 법설이 되었고,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제례는 동학의 사상을 가장 잘 담은 제례법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해월 최시형은 은신하면서 붕괴 직전의 교단을 정비하고 후계 체제를 정립하여 이후 손병희가 천도교로 교명을 바꾸고 국내 제일의 교단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The Donghak peasant, defeate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disbanded in the Taein battle. Hae-wol, who was watching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Jeonbuk Imsil, met Son Byeong-hee, a so-called 'BUKJUBKUN'(北接軍). The Donghak leadership succeeded in hiding from the Jeolla province, Chungcheong province, and Gyeonggi province through Inje, Gangwon province, overcoming the government forces and the Japanese army.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at the risk of being collapsed, but the leadership centered on Haewol devoted to reconstruction of Donghak denomination. For about four years from 1895 until his arrest in April 1898, he established the basis for the reconstruction of Donghak. Major activities during this period were: First, renovating the denomination by introducing young leaders such as Son Byeong-hee, Kim Yeon-guk, and Son Cheon-Min into the front of the denomination. In the end, Son Byeong-hee was given responsibility for the denomination. Second, he extended the influence to the north region of Hwanghae province, Pyeongan province, and Hamkyung province, which have not been affected by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s a new prospect of propagation. Third, he contributed to the establishment of Donghak doctrine. The law that Haewol presented at this time became an important basis for the subsequent consciousness doctrine of Donghak. The law of 'MANSAJI(萬事知) is a bowl of rice' has become a law that represents Donghak 's life idea, and the law of' HYANGASULWI(向我設位)' has been the ritual that best deals with Donghak' s id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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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원주지역 동학농민군과 의병

저자 : 이병규 ( Byungkyu Lee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49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03-126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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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원주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미약하였지만 원주가 동학과 관련이 많고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왕성하였다는 전제위에서 논의를 전개함으로서 그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다. 원주는 강원감영이 있었던 곳이다. 그래서 이서층의 세력이 강력한 편이었다. 조세수취 과정에서 이서층의 수탈로 많은 불만이 있었고 이것이 원주민란으로 표출되었다. 한편 원주를 근거로 한 사족들도 다수 있었다. 서울에서 가까워 재기를 노리는 많은 사족들이 원주에서 터를 잡고 후일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조건은 원주에서 동학포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동학농민군의 활동도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감영이 있던 곳에서 동학농민군 자체적인 활동이 이루어진 곳은 거의 없다.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성은 동학농민군이 점령한 것이고,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에는 동학농민군 활동이 없었고,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 역시 동학농민군 세력이 활발하기 보다는 동학농민군이 점령하고자 했던 곳이다. 원주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시에 있었으며 그들은 원주의 반농민군에게 철저하게 공격당하였다. 동학농민군들은 대부분이 원주의 반농민군에게 체포당하였다. 결국 원주지역에서 동학교도의 활동과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지 못하였다.
한편으로 눈여겨볼 것은 원주민란, 동학농민혁명, 의병운동 과정에서 대립과 갈등양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1885년 원주민란에서는 농민과 재지사족이 같은 편으로 이서층과 대립하였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는 동학농민군이 사족과 이서층이 중심이 반농민군과 대립하였고, 1896년 의병운동 단계에서는 재지사족, 이서층 포군이 같은 편으로 하여 정부군과 일본군과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894년을 전후한 시기에 원주라는 지역에서 이서층, 농민, 재지사족, 동학교도, 동학농민군, 포군 등 다양한 세력들은 역사적 사건에 따라 입장과 태도가 다르게 표출되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 기준, 즉 선악이나, 시비, 정의와 부정의 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이 충돌하고 이를 우리는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이재화와 이철화의 예를 통해 우리는 이 문제에 새롭게 접근할 수 있다. 이재화와 이철화는 사촌 간으로 원주민란 당시에 이재화가 농민들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그러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이철화는 반농민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는 1896년 의병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상황이 변하자 농민들의 입장을 대변한 이재화와 이철화는 다시 반농민군이 되어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고, 다시 일본의 침탈이 격해지자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국사 전개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역사발전에 공헌한 만큼 의병활동 역시 한국 역사발전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철화의 경우에서, 그리고 원주라는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이 충돌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충돌은 당시 조선 전역에서 발생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각각의 입장에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In 1894, Donghak peasant army activities in Wonju were weak. However, the debate has been lost due to the fact that Wonju is related to Donghak and the activities of Donghak peasant army were active. Wonju is where Gangwon provincial office was located. So the forces of clerks were powerful. There was a lot of dissatisfaction with clerks' abduction in the tax receipt and this was expressed by the revolt of aboriginal people.
On the other hand, there were many nobles based on Wonju. Because Wonju is close to Seoul, many nobles aiming for status recovery were planning to catch up later in Wonju. Because of this condition, Donghak missionary work in Wonju was not active and Donghak peasant army was limited in activity.
In most places where there was a provincial office, there are very few places where the Donghak peasant army had its own activities. Jeonju where Jeolla provincial office was located was occupied by Donghak peasant army and Daegu with Gyeongsang provincial office had no Donghak peasant army activity. Gongju, where the Chungcheong Provincial Office was located, was where Donghak peasant army hoped to occupy the Donghak peasant army, not where the forces were active.
The activities of the Donghak peasant army in Wonju were in the second uprising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They were thoroughly attacked by Wonju's anti-peasant army. Most Donghak peasant armies were arrested by Wonju's anti-peasant army. In the end, activities of Donghak followers and activities of Donghak peasant army were not active in Wonju area.
One thing to keep in mind is that conflicts are not common in Wonju Uprising,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Righteous Army movement. In 1885, in Wonju, the peasant and intellectuals were confronted with clerks. In 1894,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opposed the anti-peasant army of the nobles and clerks. In the Righteous Army movement in 1896, intellectuals, clerks, and artillery were on the same side, showing confrontation with government and Japanese forces.
In the area around Wonju in 1894, various forces such as clerks, farmers, intellectuals, Donghak followers, Donghak peasant army, and artillery forces have different attitudes and attitudes according to historical events. It is not accounted for by absolute standards, namely, good and evil, justice, and injustice. The parties would have done their best in their own terms.
However, since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the Righteous Army are in conflict, we must interpret it and give meaning to it. The example of Lee Jae-Hwa and Lee Chul-Hwa gives us a new approach to this problem. Lee Jae- Hwa and Lee Chul-Hwa were cousins and Lee Jae-Hwa at the time of Wonju people represented the position of the farmers. However, at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1894, Lee Chul-Hwa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antipeasant army activities, leading the Donghak peasant army subjugation. And in 1896 he actively took part in the Righteous Army movement.
As circumstances changed, Lee Jae-Hwa and Lee Chul-Hwa, representing the farmers' position, attacked the Donghak peasant army again as an anti-peasant army, and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Righteous Army activities when Japan's invasion intensified. Since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Korean history, Righteous Army activities also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Korean history. However, in the case of Lee Chul-Hwa, we find a point where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and Righteous Army collide in Wonju. These conflicts occurred throughout the Joseon Dynasty. We must give value and meaning to each of these historical f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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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동학농민혁명지도자 김덕명의 활동과 원평

저자 : 정성미 ( Sungmi Jung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49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63-196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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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은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손화중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금구지역의 대접주였다. 그는 원평집회의 주역이었고 1894년 4월 무장봉기 이후 백산대회, 전주성 점령, 원평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논문은 사료와 연구자료, 구술을 바탕으로 김덕명의 가계와 활동, 그리고 그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원평지역의 동학농민혁명 활동 전반에 관한 검토 내용이다.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원평은 교통의 요지이자 물산과 정보가 모이는 곳으로 김덕명을 비롯하여 전봉준, 김개남, 최경선 등의 지역적 연고지이자 기반이었다. 둘째, 1894년 백산대회 때 김덕명이 맡은 총참모라는 직책은 동학농민군의 전략과 전술을 자문하는 역할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세째, 김덕명은 서울에서 처형된 다른 지도자들과는 달리 그의 시신은 친구들에 의하여 원평으로 옮겨졌다. 처형된 농민지도자 중 유일하게 시신이 옮겨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평소 인간 관계나 경제적 기반을 엿볼 수 있다. 넷째, 기록의 평가와 해석문제이다. 정부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며 제한적이지만 원평지역에서 일어난 전투과정과 결과를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원평전투에서 37명만 희생되었는가하는 문제이다. 총포가 대동된 7시간 동안의 전투라는 점에서 더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향후 이 지역 동학농민지도자 연구는 참여자에 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Kim, Duk-myoung, one of major leaders who represente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ith Jeon, Bong-jun, Kim, Kae-nam, Choi, Kyung-sun and Sohn, Hwa-jung was a Daejubju. He was a leading role of Wonpyung Assembly. He also played a major role in Baeksan Assembly, occupation of Jeonju, and Wonpyung Battle after Mujang Uprising in April. 1894.
This article is a study about Kim, Duk-myoung's family and lineage, activities, and his local base, Wonpyung region, based on historical materials, researches, and interviews.
First, Wonpyung was a major transportation point and a place where materials and info were collected. And it was also the hometown and base for Jeon, Bong-jun, Kim, Kae-nam, and Choi, Kyung-sun as well as Kim, Dukmyoung.
Second, in Baeksan Uprising in 1894, the position of overall adviser, occupied by Kim, Duk-myoung seems to be a role for consulting and advising strategies and tactics for the Donghak Peasant Army.
Third, Kim, Duk-myoung's body, unlike those of the other leaders, was transferred to Wonpyung by his friends. The fact that he was the only person whose body could be transferred among the peasant leaders who were executed, could be an evidence for his ordinary human relations.
Fourth, the evalua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records should matter. The governmental records are very fragmentary and limited but contain relatively detailed process and result of the battle in Wonpyung area. However, the whether just 37 people were killed in the actual Wonpyung Battle can be problematic. Because the battle was made for 7 hours with firearms and there were more casualties.
Fifth, it is necessary to precede the analysis on the entire leaders for the study about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his area in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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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나타난 합일지향성과 동학사상

저자 : 최옥선 ( Okseon Choi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49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97-220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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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나타난 합일지향성을 동학사상과 관련지어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 방법으로는, 『님의 침묵』의 작품을 중심으로 동학의 '모심'과 평등사상과의 연관성을 분석한다. 또 동학의 '살림'과 생명성 회복과의 연관성도 분석한다. 이로써 『님의 침묵』에 나타난 합일지향성과 동학사상과의 연관성을 밝혀낼 수 있다.
이 연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님의 침묵』의 '나'는 '님'이 부재한 비극적 현실을 인식하고, '모심'이라는 수양의 도(道)로써 관계의 평등성이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둘째, '나'는 '님'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살림'이라는 실천적도(道)로써 근원적 생명성이 회복되기를 지향한다.
연구 결과는 첫째, 『님의 침묵』에 나타난 평등성 회복을 위한 수양적 도(道)는 시천주의 '모심'과 만물 평등사상과 연관됨을 알 수 있었다. 둘째, 『님의 침묵』에 나타난 생명성 회복을 위한 실천적 행위는 동학의 실천적 윤리인 사인 여천의 '살림' 과 연관됨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나타난 합일지향성은 민족주의를 넘어선 보편적 인류애로서, 만물 평등 회복과 근원적 생명성 회복에 대한 수양과 실천의 노래였다.


This study intends to clarify orientation towards oneness (union) reflected in “Love's silence (Nimui Chimmuk)” of Han Yong-un by associating it with Donghak thought.
As for the research methods, firstly, they arebased on the analysis of the correlation between “Mosim” & principle of equality of Donghak and the poem “Love's silence.” Secondly, they are based on the analysis of connection between “Salim” & recovery of life” and the poem “Love's silence.” With this, it is possible to clarify that orientation towards oneness observed in “Love's silence” is closely related to Donghak thoughts.
As for the results of this study, firstly, “Love's silence (Nimui Chimmuk)” expects that “I” should recognize the tragic reality where “my beloved one” is absent and the equality of relationship as a way to self-discipline based on “Mosim” should be recovered. Secondly, it wishes that “I” look forward to meeting “my beloved one” and aim at the recovery of fundamental life as a practical “way” based on “Salim.”
The research results show: Firstly, the way to self-discipline for recovery of equality of “me” and “my beloved one” reflected in “Love's silence (Nimui Chimmuk)” has a correlation with “Moshim” and principle of equality of all creatures observed in “Sicheon ideology” or “Heart of Heaven” of Donghak. Secondly, the practical act for recovery of life reflected in “Love's silence “ is highly related to “Salim” which is the practical ethics of Donghak based on the concept of “serving people like the Heaven.” In this regard, orientation towards oneness shown in “Love's silence” is considered a universal love for humanity beyond nationalism and a practical song wishing for recovery of equality of all creatures and restoration of fundament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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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다문화교육의 접근방향과 동학의 인륜관

저자 : 김희진 ( Heejin Kim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49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21-244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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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국제사회의 변화흐름 가운데 다문화시대의 다문화교육의 접근방향을 모색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적 접근방법으로서 한민족의 동학사상이 지니고 있는 만민평등사상과 인간존중사상, 보편적 인륜관을 살펴보고, 기존의 불교의 경전이나 기독교의 성경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인류애나 평등, 자유 등의 개념과 차별되는 동학사상의특징은 무엇인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다문화교육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각국의 민족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고 그들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보편타당한 교육이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바탕을 둔다면 동학사상이 지니고 있는 인간존중과 만민평등사상은 한국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와 그들의 자녀들에게 내국인과의 차별 없는 상호존중 관계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문화시대 다문화교육의 목적과 현황을 분석하고, 우리나라도 다문화 사회로의 변화과정에서 나타나는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민자들의 유입에 따른 인구구성의 변화를 탐구하여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화적 갈등과 사회 통합의 문제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동학의 인간관은 다문화교육에 있어 주요 목표로서 정의 내려질 수 있다. 말하자면 인종, 성별, 문화적 차이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차별 없는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셋째, 동학사상에는 만민평등사상과 보편적 인류애가 내재되어 다문화교육을 위한 사상적 근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 개개인의 가치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새 세상을 이루기 위한 효과적 대안이 될 수 있다. 다문화교육은 다양성을 통한 통합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화와 민족공동체를 통한 국제사회와의 공존을 지향할 수 있다.
이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문화교육은 각 나라가 가지고 있는 민족적 가치를 내면화하면서도 다양성을 통한 통합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둘째, 동학의 만민평등사상에는 인간존중이라는 보편적 인류애가 내재해 있다.
셋째, 동학사상이 지닌 인륜관과 민족공동체 이념은 다양한 문화와 소통할 수 있는 보편적 근거가 될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explore the common sense of human equality, human respect, and human history as an alternative approach to finding and solving the approach of multicultural education amid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community.
Multicultural education should be a universal education in which people in communities composed of ethnic groups in different languages can guarantee their basic freedom and rights without discrimination. Based on this sense of problem, the human respect and the idea of equalization of the same school spirit could lead to unbiased mutual respect for foreign workers and their children in Korea. Therefore, the conten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we will analyze the purpose and status of multicultural education in the multicultural era and explore the changes in population composition resulting from the influx of foreign workers and married immigrants in the process of changing into a multicultural society to examine the cultural conflicts and social integration issues facing Korean society. Second, the human mind of Donghak can be defined as a major goal in multicultural education. In other words, it provides everyone with an equal opportunity for education without discrimination, regardless of race, gender or cultural differences. Third, the idea of universal equality and universal humanity can be an ideological basis for multicultural education. Therefore, while respecting the values and diversity of each human being, it can be an effective alternative to a new world. Multicultural education can aim for coexistence with the international community through globalization and ethnic communities in that it aims to integrate through diversity.
Therefore, while fundamental to the Korean people's traditions and ideas, the establishment of education directions for various foreign workers, marriage residents and children of the next generation will be of paramount importance. Therefore, the idea of universal equality and universal love of Donghak ideas could be the ideological foundation for multicultural education.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multicultural education aims to integrate through diversity while internalizing the national values of each country. Second, the idea of universal equality among the people of Donghak has a universal love of humanity. Third, the ethnology of Donghak ideology will be a universal basis for communicating with various cultures.
Therefore, while fundamental to the Korean people's traditions and ideas, the establishment of education directions for various foreign workers, marriage residents and children of the next generation will be of paramount importance. Therefore, the idea of universal equality and universal love of Donghak ideas could be the ideological foundation for multicultural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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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보은 동학민회와 북접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

저자 : 손윤 ( Yun Son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49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45-283 (3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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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의 목적은 동학혁명에 관한 연구를 통해, 1893년 3월 10일 해월 최시형이 북접대도주의 지위로 보은 장내리에 전국의 동학교도들에게 소집령을 내린 보은취회(보은 민회로 정의)의 역사성과 정체성 연구를 통해, 동학혁명이 우연하게 일어나 단발적인 사건이 아닌, 한민족의 전통 사상과 문화, 철학이 함축된 민본의 역사임을 밝히고, 존재성에 관해 남접의 정체를 밝히면서, 북접과 동학교단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이에 대한 연구방법은 도원기서 등 동학창시 당시 수운의 행적 등의 참고 문헌과 동학혁명 당시 북접 법헌이었던 최시형의 동학군 동향 등 1차 사료와 문헌 등을 인용하여 서술하였다.
이 연구의 내용은 보은취회는 동학민회로 정의하여야 하며, 북접은 동학 또는 동학교단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이다. 첫 번째는 보은에서의 집회는 사료에 의해 맞고, 전주화약 직후 실시했던 집강소 설치 운영이 민회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북접은 1863년 7월에 최제우가 제자 최시형에 북도중주인, 즉 북접주인이라고 임명한 사실로 시작하여, 동학혁명 기간(1893~1895)이 끝난 후인 1904년 이후에도 의암 손병희가 북접법대도주로 첩지를 내린 사료를 보아도 북접은 남접에 대응하는 일시적 용어가 아니며, 동학 또는 동학교단의 정체성이며, 동학혁명을 지휘한 북접대도소, 즉 동학지휘부를 지칭하는 용이다.
이 연구의 결과는 전국을 망라하여 동학혁명을 총지휘했던 북접의 역사성과 정체성, 용어 정의 등을 새롭게 연구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eal the history of The Donghak Revolution on March 10, 1893, through a study of the identity of Boeuncivic( North fold owner, Choi-shihong), The Donghak Revolution was not a one-time event that happened accidentally, but it was a pharmacist of Korean Minjok implied Korean traditional ideas, culture, and philosophy. In The Donghak Revolution, I clarified the identity of the South-Fold, and I studied the identity of the North fold and Donghak. In 1860, when studying Donghak, it was based on the first articles such as the history of Suhwon and the records of the North fold owner Choi-shihong and the trend of Donghak army during The Donghak revolution in 1894.
The meeting in Boeun is that it should be defined as the Boeun-civic, and the North fold is a different name of the Donghak or Donghak religious order. The first is that the meeting in Boeun is done by the feed, and the installation of the the Zipkang station which was carried out immediately after the Jeonju explosion was the practice of the assembly. The second is the fact that in the year of 1863, Choi-jewoo appointed to his disciples Choi-shihong as the North fold owner, and even after 1904, when Donghak revolutionary period (1893 ~ 1895) Even if you look at the papers that have been published, it is a transitory term that corresponds to the South-Fold, and is the identity of the Donghak or Donghak religious order itself.
The result of this study is that it is the study which secured the objectivity such as history and identity of the North fold covering the whole country.

KCI등재

9동학혁명사상의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 - 수운 최제우, 해월 최시형의 사상을 중심으로-

저자 : 이덕일 ( Dukil Lee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49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85-314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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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의 농민봉기에 대한 논저는 많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전국적 규모의 농민봉기가 어떤 사상적 경로를 거쳐 반제·반봉건을 목표로 내세우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은 부족했다. 1894년에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이 내걸었던 반제·반봉건이란 슬로건은 어느날 갑자기 나온 구호가 아니었다. 동학은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고, 최시형이 그 후계자가 되었는데, 두 사람의 사상 속에 이미 반제·반봉건의 틀이 완성되어 있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1894년 동학 농민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반제·반봉건이란 혁명의 슬로건을 내세울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수운과 해월의 사상은 서로 보완관계였지만 그 주안점은 조금 달랐다. 수운의 사상은 조선 봉건사회 체제 변혁이란 성격보다는 외세에 대한 저항에 더 큰 강조점이 있었다. 수운은 서양 세력과 천주교(서교)를 조선 사회의 가장 큰 위협으로 생각했다. 이는 동학농민혁명의 사상 중 반제국주의 성격을 명확하게 말해주는 점이다.
해월의 사상은 수운의 이런 반외세 사상에 조선의 신분제를 거부하는 평등 사상을 가미한 것이었다. 해월은 반상차별, 적서차별, 남녀차별 등의 조선 성리학 사회의 신분제를 전면에서 부정하는 평등사상을 동학의 교리로 확립시켰다. 수운의 반제 사상에 해월의 반봉건 사상이 결합하면서 동학은 반제반봉건 혁명으로 나갈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완성시킨 것이다. 이 두 사상이 결합하면서 동학이 처음으로 교단 차원의 운동에 나섰던 교조신원운동에서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서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주장이 나올 수 있었다. 이런 사상이 자연스레 반제·반봉건 혁명이었던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 논문을 통해 수운과 해월의 사상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There were many articles on the peasant uprising in 1894. However, there were a lack of discussions about what ideological channels the nationwide peasant uprising, calle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let to antiimperialism and anti-feudalism. In 1894, the slogan of anti-Imperialism and anti-Feudalism, which were presented by Bong-Jun Jeon,Gai-Nam Kim, Hwa- Joong Son, were not slogans that came one day suddenly. Donghak was began by Je-woo Choiin 1860, and Si-hyung Choi became the successor and in the ideas of the two teachers, the ideas ofanti-imperialism and anti-feudalism were already complet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look at how Donghak peasants could present the slogan of the Revolution, anti-imperialism and anti-feudalism. These ideas were complementary to each other, but their points were slightly different.
Choi's ideas emphasized resistance and betrayal to foreign powers rather than thinking about the collapse of the Joseon feudalism Dynasty. Je-woo Choi considered the Western power and Catholicism(Western Learning) the greatest threat to Joseon society.This clearly expresses the nature of anti-imperialism among the ideas of the Donghak Revolution.
The idea of Choi Si-hyung was based on the idea of Je-woo Choi with an equal idea of reflecting the Joseon Dynasty's status system. Si-hyung Choi established the idea of equality in which the social status of Joseon's Neo- Cunfucianism such as social status discrimination, child of legitimatcywith child of a concubine discrimination(적서차별), gender discrimination is denied from the front.
By combining Je-woo Choi's anti-imperialism ideology with Si-hyung Choi'santi-feudalism ideology, Donghak had completed the ideological foundation that could led to the anti-imperialism and anti- feudalism Revolution.
When these two ideas were combined, the Donghak could claim not only religious freedom as undo the injustice of Je-woo Choi(교조신원) but also political reform. These Ideas developed into the Donghak Peasants' Revolution in 1894, when the anti-Imperialism and anti-Feudalism Revolution were naturally established.
The paper will show that the ideas of Je-woo Choi and Si-hyung Choi were the ideological basis of the 1894 Donghak Peasants' Revolution.

KCI등재

10해월 최시형 선생과 경주 - 경주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저자 : 김영철 ( Youngchul Kim )

발행기관 : 동학학회 간행물 : 동학학보 49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15-343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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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해월 최시형과 경주의 연관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곧 경주와 동학의 필연적 연결고리를 찾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왜 경주에서 동학이 창도되었는지를 질문하면서, 경주라는 도시가 동학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한다. 또한 동학을 통해 경주는 어떠한 위상을 갖게 되었는가를 질문한다. 이러한 이유로 연구 영역을 가능한 경주 지역에 한정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해 해월의 주요 활동에 대한 논의를 다루지 않는다. 또한 해월의 사상과 관련된 논의도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 연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경주는 신라 천년이라는 찬란한 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 문화 정신의 터전이었다. 또한 인류와 자연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이상을 지닌 동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주에서의 성장환경은 곧 해월의 주요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basically to examine the relation between Haewol and Gyeongju. This is the task of finding the necessary link between Gyeongju and Donghak. I ask why the Donghak was created in Gyeongju, and I think about the meaning of Gyeongju in Donghak. In addition, we ask what kind of status Gyeongju had through Donghak. For this reason, the research area was limited to the Gyeongju region as much as possible. This does not address the discussion of the main activities of the sea. Also, the discussion on the idea of Haewol is not covered here.
The contents of this study were as follows. Gyeongju was the birthplace of the glorious culture of Silla in the millennium, but it was the base of our national culture. It is also the birthplace of Donghak, the ideal of love and respect for mankind and nature. The growth environment in Gyeongju soon became the foundation of Haewol 's major id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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