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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JI COLLECTION OF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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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95)~62권0호(2020) |수록논문 수 : 712
온지논총
62권0호(2020년 01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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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노자(老子) 사상의 문학 수용 양상과 그 의미 -연암 박지원의 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저자 : 박수밀 ( Park Sumil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9-37 (2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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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문학의 관점에서 조선 시대 노자 사상이 조선 지식인에게 끼친 영향을 탐구한 것이다. 노자와 장자를 함께 묶어서 노장으로 부르던 기존의 접근 태도에서 벗어나 노자의 개별성에 주목해 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먼저는 노자의 조선조 수용 양상을 정리하고 이에 대한 연구자들의 논의를 살펴 그 성과와 한계를 점검해 보았다. 조선 시대 노자연구는 노자 주석서와 『독노자오칙(讀老子五則)』에 집중되었다. 그 연구태도에서는 노자의 개념어와 유학의 개념어를 비교해가며 철학적 의미를 밝히는 논의가 주를 이루어왔다. 주석자들의 노자 이해가 그의 삶과 문학, 세계관 속에 어떻게 조응되고 연결되는지에 대한 관심은 약했다. 노자는 공자를 조롱하고 성인의 가르침을 끊으라고 하고 유위(有爲)를 극력 배격한 사람이라서 유학의 세계에선 곧바로 수용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연암 박지원은 노자를 충분히 이해하고 작품에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연암 박지원이 말한 무지(無知)와 「허생전」에 나타난 무인도에 주목해 연암 문학에서 노자 사상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지식과 문자에 대해 의문을 품는 연암의 시선에서 노자의 무지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 연암이 문자를 회의(懷疑)하고 지식을 비판한 것이 노자의 무지와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전 시대 유학자 가운데 지식에 의문을 품고 문자를 회의(懷疑)한 이는 연암 외엔 찾기가 힘들었다. 두 번째로 『옥갑야화』의 허생이 건설한 무인공도(無人空島)에서 노자 사상의 흔적을 살폈다. 허생이 세운 무인도는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고 허생의 섬은 연암이 독자적으로 만든 연암만의 이상 세계였다. 그 꿈 가운데 노자의 이상향이 녹아 있었다.


This study is to reveal the influence of Noja's thought to the intellectual of Chosun dynasty in terms of literature. Scholars usually have divided Noja and Changja, for so far they have been studied at once so called No-Chang, yet, this study avoids such a previous approach and focuses on the unique of Noja. First, for this it reviews the aspect of understanding Noja in Chosun dynasty, its opinions of researchers, and realizes its achievement and limitation. The study of Noja in Chosun dynasty was done mainly in his commentaries and 'DokNojaOch'ik'. Its approach was to compare the conceptional words of Noja and those of Confucianism, to find the philosophical meaning of theirs. The understanding of those commentators was not deeply involved in the concern of connecting with Noja's life, literature and his outlook on the world. Noja insisted on cutting Confucian and his teachings, rejected the efficiency, so it was difficult to receive him in the world of Confucianism. However YeonAm, Park Jiwon fully understood him in the latter of Chosun dynasty. In this sense this study searches for the hints of Noja's thought in YeonAm literature, mainly in his works of 'HeosaengJeon' and ignorance mentioned by him. In his insight of doubting knowledge and letter, there is connecting point with the ignorance of Noja. YoenAm's pessimistic approach to letter and critical attitude to knowledge are not exactly the same as Noja's ignorance. Yet there was no one except YoenAam who had doubted knowledge and challenged letter. Second, Noja's thought could be found in Muingongdo built by Heosaeng of 'Okgapyahwa'. There were previous studies that YeonAm's desert island looks similar to Sokukgwhwamin of Noja, now this study develops that point more deeply. The desert island built by Heosaeng is not completely the same as Sokkukmin of Noja. The Island of Heosaeng is the unique ideal world created by YeonAm. This dream contains the Utopia of No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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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최현(崔晛)의 『조천일록(朝天日錄)』에 나타난 의례관련 사실들과 그 의미

저자 : 성영애 ( Sung Young-ai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39-87 (49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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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일록(朝天日錄)』은 광해군 즉위년에 최현(崔晛)이 명(明)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의 동지사행(冬至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받아가서 기록한 사행일기이다. 이 사행에서 최현은 46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장관이란 큰 직책을 수행하였는데, 『조천일록』에는 조선과 명의 조정에서 나타나는 의례와 명 민간에서 나타나는 의례에 대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최현의 『조천일록』에서 나타나는 조선에서의 의례는 친명사대(親明事大)의 외교정책 중 하나인 배표례(拜表禮)를 선조(宣祖)의 국상으로 인해 권정례(權停例)로 행하였고, 전별연(餞別宴)은 국왕이 내려주는 사연(賜宴)과, 평양(平壤) 기자묘(箕子墓)에서 중사(中祀)로서 제사지내고 을밀대(乙密臺)에서 지방관이 내려주는 공식적 전별연이었다. 의주(義州)는 국경을 넘어가는 관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으로 들어오는 첫 길목이 되기도 하는 전별 장소로서, 사연(私宴)이 베풀어진 전별연이었다.
최현의 『조천일록』에서 나타나는 명에서의 의례는 공적인 의례와 사적인 의례로 구분되었는데, 공적인 의례에는 현관례(見官禮)·현당례(見堂禮)·현조례(見朝禮)와, 하마연(下馬宴)과 기타 전별연이 해당되었다. 현관례는 회원관(懷遠館)에서 요동도사와 부총병에게 행하였고, 회동관(會同館)에서 제독주사에게도 행하였다. 현조례는 북경 자금성(紫禁城) 오문(午門) 밖에서 오배삼고두례(五拜三叩頭禮)로 황제를 알현하였고, 현당례는 예부상서에게 행하였다. 또 최현 일행은 조천궁(朝天宮)에서 두번의 연의(演儀)를 통해 자금성 동지 하례(冬至賀禮)에 참석하였다. 최현 일행은 회원관을 지나면서 현관례뿐만 아니라 하마연도 선조의 국상으로 인해 면제받았다. 기타 전별연은 최현이 명의 조정에서 공식적인 전별연을 전해 듣고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최현의 『조천일록』에서 나타나는 현관례는 조선의 입장에선 경사스러운 예식의 하나로서 가례(嘉禮)에 해당되고, 명의 입장에선 조선은 여러 나라 사신 가운데 하나로서 조선사신을 영접하므로 빈례(賓禮)에 해당되는 예를 국가 간에 서로 행하였다. 사적인 의례에는 개인 간에 베푼 전별연으로, 탐풍(貪風)이 만연한 회원관에서 표류당인(漂流唐人)이 베풀어 준 연회와 산해관(山海關)에서 최현 일행이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성절사(聖節使)에게 베푼 연회, 모두 사연(私宴)이었다.
최현이 살았던 시기는 주자가례(朱子家禮)식의 상제(喪制)가 만연하게 퍼져있던 예학(禮學)의 시대였다. 그래서 한 사람이 유교식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지킨다고 해서 중원 모두가 유교식 상례와 제례를 지키면서 예를 다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례와 제례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잘 살고 못 살고와 상관없이 부모상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옛 법도가 무너졌음을 비판하였다. 『조천일록』에서 나타나는 명 민간의 상례와 제례는 최현이 생각하는 예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위였다. 최현이 생각하는 예의 기준은 『예기(禮記)』와 『주자가례』에 준하는 예로서, 이 기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비례(非禮)로 봤다.


Choi, Hyeon's Jocheon-illok(朝天日錄) is an envoy journal recording the participation as a government official in the winter envoy march for the Emperor Shenzong(神宗, 萬曆帝, Wanli) of the Ming Dynasty, in the enthronement year of Gwanghaegun(光海君). In this envoy march, Choi, Hyeon performed a big position of government official at the age of 46. His Jocheon-illok(朝天日錄) contains the contents about all sorts of objects or problems related to system, policy, society, custom, and people's livelihood viewed in Ming.
Regarding the ritual of the Joseon Dynasty shown in Choi, Hyeon's Jocheon-illok(朝天日錄), the baepyo ritual(拜表禮) which was one of the diplomatic policies close to Ming was simply performed without the king due to the national mourning of King Seonjo(宣祖). The farewell party(餞別宴) included the national feast provided by the king, and the ancestral rite at the shrine of Kijain(箕子墓) in Pyeongyang(平壤). It was the official farewell(餞別宴) party provided by a local governor in Eulmildae(乙密臺). Not only as a gateway to cross the border, but also as the first path to enter Joseon, Uiju(義州) was the place where the farewell party(餞別宴) was held.
Regarding the ritual of the Ming Dynasty shown in Choi, Hyeon's Jocheon-illok(朝天日錄), the greeting ritual was performed for Liaodongdusi(遼東都司) and Buchongbyeong(副總兵) at Hoewongwan(government office for envoy, 懷遠館), and also for Jedokjusa(提督主司) at Hoedonggwan(government office for envoy, 懷東館). Choi, Hyeon aimed to inform the pervading corruption of China by fully listing the bribe goods/quantity and official rank/name of Ming's government officials who offered them at Hoewongwan(懷遠館). When passing Hoewongwan(懷遠館), Choi, Hyeon's party sometimes was freed from greeting ritual while the private feast for envoy was exempt due to the national mourning of King Seonjo(宣祖). Choi, Hyeon's party greeted the emperor with five times of deep bow and three times of light bow(五拜三叩頭禮) outside of O-mun(午門) of Forbidden City(紫禁城) in Beijing, and also visited and greeted Yebusangseo (禮部上書). Also, Choi, Hyeon's party attended the winter ceremonial ritual(冬至賀禮) at Forbidden City(紫禁城), by following two times of ritual practice in Jocheongung(朝天宮) The farewell party was a feast provided by Pyoryudangin (漂流唐人) in Hoewongwan(懷遠館). As a feast for Choi, Hyeon's party who was about to go back to Joseon after completing the duties in Sanhaegwan(山海關), they were all private feasts. And there was a case of hearing and recording the news about official farewell party from the Ming's royal court. The greeting ritual shown in Choi, Hyeon's Jocheon-illok(朝天日錄) was one of the joyous ceremonies in the position of Joseon. In the position of Ming, Joseon was one of the envoys from many countries, so that the courtesy related to the ritual for receiving guests was conducted.
The period when Choi, Hyeon lived was the age of ritual studies filled with the funeral rites system of Confucian ritualism. Therefore, no one thought that a single person who obeyed the Confucian funeral rites and ancestral rites would mean that everyone in the central position would obey the Confucian funeral and ancestral rites. It was criticized that the old custom was collapsed because the parents' funerals were not fully obeyed regardless of position and wealth. The funeral rites and ancestral rites shown in Jocheon-illok(朝天日錄) were the acts out of the courtesy standard in Choi, Hyeon's opinion. Choi, Hyeon's courtesy standard was the courtesy under the Classic of Rites(禮記) and Confucian Ritualism(朱子家禮) As they were the acts out of this standard, they were regarded as non-court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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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녀 성(性) 바꾸기' 환생담에 나타난 독자의 욕망 고찰 -조선 후기 고소설 <하씨선행후대록> · <한조삼성기봉> · <삼생록>을 중심으로-

저자 : 구선정 ( Koo Sun-jung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89-122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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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남녀 성(性) 바꾸기' 환생담을 설정하고 있는 조선 후기 고소설인 <하씨선행후대록>(33권33책)·<한조삼성기봉>(14권14책)·<삼생록>(1권1책)을 통해 조선 후기 독자의 욕망과 스토리텔링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고찰하는 것이었다. 이들 작품은 남녀 인물들이 성(性)을 바꿔 환생하여 상대성의 역할을 체험한다는 점에서 기존 환생담과의 차별성을 지닌다.
<하씨선행후대록>에서 '남녀 성(性) 바꾸기' 환생담의 주인공은 곽씨라는 인물이다. 고이랑과 장대랑은 서로 원한 관계에 있었는데, 환생하여 고이랑은 황월혜로 장대랑은 곽씨라는 여자로 태어난다. 곽씨는 원한 관계에 있는 황월혜뿐만 아니라 하씨 가문의 여성들에게 악행을 저지르며 악랄한 여성 악인으로 형상화 된다. 또한 전생의 男女대립을 女女대립으로 치환하여 여성들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한조삼성기봉>에서 '남녀 성(性) 바꾸기' 환생담의 주인공은 강왕과 조수아다. 이들은 후한 시대의 곽후와 광무제였는데, 서로 성(性)을 바꿔 당(唐) 시대에 환생하여 강왕과 조수아가 된다. 본 작품의 '남녀 성(性) 바꾸기' 환생담은 여성 복수담으로 여성에 대한 지지와 남성에 대한 불신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곽후의 현신(現身)인 강왕 또한 가부장제 이념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여성주의 소설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삼생록>에서 '남녀 성(性) 바꾸기' 환생담의 주인공은 만춘과 향란이다. 두 번째 환생에서 '남녀 성(性) 바꾸기'가 일어난다. 본 작품의 '남녀 성(性) 바꾸기'환생담은 상대성에 대한 이해의 장치로 쓰인다. 남녀주인공은 '고난과 시련-성(性)바꿈을 통한 서로 간의 이해-구원과 자비'의 과정을 통해서 남녀의 애정을 실현하고 천상의 신으로 복귀한다.
여성 악인의 형상화와 여여 대립의 심화를 통해 여성의 행실을 경계하는 <하씨선행후대록>, 여성의 雪寃과 가부장제 이념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조삼성기봉>, 양성의 평등과 이해를 추구하는 <삼생록>까지 '남녀 성(性)바꾸기' 환생담에는 가부장제의 '체득-균열-변화'에 이르는 조선 후기 다양한 독자들의 서사적 욕망이 내재하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씨선행후대록>·<한조삼성기봉>·<삼생록>의 '남녀 성(性) 바꾸기' 환생담은 각각 환생을 징벌(懲罰)에서 설원(雪寃), 더 나아가 이해의 공간으로 형상화한다. 전작이나 전생의 가치를 顚倒·顚覆시켜 새로운 이야기를 재창조한다는 점에서 스토리텔링 텍스트로서 가치가 있다. 우리가 환생을 꿈꾸는 것은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 더 나은 곳에 태어나 행복하기를 희망하는 바람 때문이다. '남녀 성(性) 바꾸기' 환생담은 그러한 독자들의 욕망을 다시 쓰기를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This paper looks into the desire of readers and evaluates the textual value of the < Hasiseonhaenghudaerok >·< Hanjosamsungibong >·< Samsengrok >, the old novels of the late Joseon Dynasty period that institute a setting of gender switch between a man and a woman. These works are different from pre-existing reincarnation stories in that characters switch their gender and experience the role of the opposite sex.
In < Hasiseonhaenghudaerok >, Jang Daerang, who was a man, is reborn as a woman named Gwak. This maximizes the image of the female villain and amplifies the conflict among women by replacing men-women opposition of the previous life with women-women opposition.
In < Hanjosamsungibong >, Kwakhu is reborn as Kangwang, a man, and Kwanmujae is reborn as Jo Su-Ah, a woman. It functions as a female revenge narrative, and expresses support for women and distrust towards men.
In < Samsengrok >, Manchun and Hyanran are born as the opposite sex. The gender switch in this reincarnation story is used as a device for understanding the opposite sex.
< Hasiseonhaenghudaerok >, which emphasizes the conduct and virtue of women through embodiment of the female villain and maximization of women-women opposition; < Hanjosamsungibong >, which moves back and forth between women's revenge and patiarchal ideology; and < Hanjosamsungibong >, which pursues gender equality and understanding, are all reincarnation stories that contain narrative desires of the readers, who lived in the late Joseon period, where patriarchy was learned, divided, and changed.
The gender switch reincarnation stories, < Hasiseonhaenghudaerok >·< Hanjosamsungibong > ·< Samsengrok > portray reincarnation from a penalty to revenge, a space of understanding and harmony. They are valuable as storytelling texts in that they turn over the values of original works and create new stories. We dream of reincarnation because we desire to leave the difficulties of life and be born in a better place. Gender switch reincarnation stories are meaningful in that they show the desire of the readers through re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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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악곡으로 본 시조 종장(終章)의 형식적 연원 -중장과의 관련성에 주목하여-

저자 : 박재민 ( Park Jae Min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23-152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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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시조의 종장에 나타나는 '3字 + 5字 + 4字 + 3字'의 율격 중, 왜 두 번째 음보에 '5음절'이 오는가에 대해 해명한 결과물이다. 그간 우리는 시조 종장이 지닌 '3字 + 5字 + 4字 + 3字'의 특이성에 대해 '시적 긴장'을 위한 장치라는 시각에서 접근해 왔다. 이 시각은 시조의 종장이 우리에게 어떤 美感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대답은 되었지만, 종장에 그런 형태가 나타나게 된 까닭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이에 본고는 종장에 특이한 형태가 생겨난 연원에 대해 노랫말과 악곡의 양상을 활용해 해명하였다.
먼저 주목한 것은, '종장에서 첫 음보를 제외한 형태는 '5字 + 4字 + 3字'인데 이것이 발생기 시조의 중장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란 점이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가곡집인 『고금가곡』을 대상으로 통계를 내어본 결과 260수 중 58수의 중장 前半에서 '5字'가 나타남을 확인했다. 이에 반해 여타의 위치, 즉 초장의 前半, 초장의 後半, 중장의 後半에서는 이 형태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 점으로 시조의 중장은 종장과 상당히 강한 친연성을 지닌 부분임이 감지되었다.
다음으로 주목한 것은 '종장의 제2음보 이하에 잦은 빈도로 나타나는 '3字 + 3字 + 4字 + 3字' 형태가 중장에도 47회 출현하는 현상'이었다. 이 형태 또한 초장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중장에서만 거의 독점적으로 나타나므로, 다시금 중장과 종장의 강한 친연성을 확인시켜 주는 한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중장 및 종장의 형태적 친연성과 관련하여, 16세기에 향유된 이른 시기의 시조 및 만대엽(또는 중대엽)에 얹혀 불린 시조의 노랫말 형태는 주목할 만한 점을 지니고 있다. 후대의 시조들에 비해 중장에 '5字 + 4字 + 3字' 형태의 노랫말이 나타나는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점이다. 그리고 종장에서 동일한 형태가 나타나고 있는데, 본고는 이 동일한 형태를 출현시킨 잠재된 힘은 중장과 종장을 싣고 있는 악곡에서 나온 것으로 가정하였다.
만대엽과 중대엽의 선율은 5旨로 나뉘는데, 제1旨에서는 초장의 前半, 제2旨에서는 초장의 後半, 제3旨에서는 중장 전체, 제4旨에서는 종장의 첫 음보, 제5旨에서는 종장의 나머지 부분을 싣는데 본고는 선율의 비교를 통하여 중장을 싣고 있는 제3旨와 종장을 싣고 있는 제5旨의 악곡이 동일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결국 노랫말의 흡사한 형태는 그것을 싣고 있는 악곡, 구체적으로는 선율의 흡사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시조 종장 제2음보에 나타난 '5字' 형태의 연원은 드디어 해명된다. 16세기 시조 및 만대엽(혹은 중대엽)에 실린 시조는 중장이 '5字'로 시작되는 3음보 형태, 즉 '5·3·4'형태가 매우 우세한데, 그 중장의 노랫말을 실은 제3旨부분과 같은 선율이 반복되는 제5旨부분에 종장의 해당부분이 실렸기에 중장과 같은 형태인 '5·4·3'의 형태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This paper is the result of exploring why '5 characters' come in the second colon of the third line of sijo, which consists of '3·5·4·3' characters. In the meantime, we have approached the peculiar form of the third line of sijo as a device for 'poetic tension'. This view was an answer to what kind of beauty the third line of sijo evoked for us, but not the reason why the form appeared in its third line. In this regard, this study used the lyrics and music aspects to explain the origin of the unusual form of the third line.
The first thing to notice is that the the second line except the first colon consists of '5·3·4' characters in general.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statistics on Gogeumgagok, which is a relatively early collection of sijo songs, it was confirmed that in the 58 sijo songs out of 260 contained '5 characters' in their second lines. On the other hand, this form did not appear at all in other positions, namely the first line and the second half of the second line. In this regard, the strong affinity of the second and third lines of sijo is highlighted.
The next thing to notice is the phenomenon in which the form of '3·3·4·3 characters' appears 47 times in the second lines of sijo songs in Gogeumgagok. Since this form is rarely seen in the first line, but almost exclusively in the second line, it is also the basis for confirming the strong affinity between the second and third lines.
Regarding the morphological affinity of the first and second lines, the early song forms of sijo, sung with “Mandaeyeop” or “Jungdaeyeop” in the 16th century, are remarkable. Compared to the later sijo songs, the proportion of lyrics of early sijo in the form of '5·3·4 characters' is much higher in the second line. The very same form appears in the third line, and this paper assumes that the music sung with the second and third lines caused the formal affinity.
Each of “Mandaeyeop” and “Jungdaeyeop” music is divided into five sections. The first section is performed with the first half of sijo line, the second section with the second half, the third section with the second line as a whole, the forth with the first colon of the third line. By comparing the melodies, it was confirmed that the third section carrying the second line and the fifth section carrying the third line were identical. In conclusion, the similar forms in sijo song was due to the similarity of the piece of music, specifically, the melody.
Then, the source of '5 characters' in the second colon of the third line of sijo is finally explained. In the 16th-century sijo sung with “Mandaeyeop” or “Jungdaeyeop”, the second line predominantly consists of '5·3·4 characters' because it was performed with the third section of music, which was the same as the fifth section, performed with the third line containing '5·4·3 charac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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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제강점기 마산지역 권번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연구

저자 : 안선희 ( An Sun Hee )

발행기관 : 온지학회 간행물 : 온지논총 62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53-187 (3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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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마산지역 권번에 대한 연구의 부재로 인해 권번에 대한 잘못 된 정보와 존재여부조차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시작되었다.
알려진 바와 달리 과거 신문기사에는 일제강점기 마산지역 권번과 관련한 많은 기사들이 있으며, 이를 토대로 권번의 설립과 운영, 소속기생들의 활동에 대해 알 수 있다.
마산지역의 권번은 남선권번, 마산예기권번이 있었다. 남선권번의 해산 후 그 후신으로 마산예기권번이 설립되었던 것으로 두 권번은 같은 권번으로 밝혀졌다.
남선권번은 1919년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역의 재력가 등 여러 후원세력으로 당시 문창권번이나 마산예기조합과의 분쟁 속에서도 계속 존재할 수 있었다. 특히 마산예기조합과의 분쟁에서는 마산 유일의 권번이자 독립적인 운영권을 갖게 되었다. 남선권번은 1930년 2월 7일 해산되었고, 1년 8개월만인 1931년 10월 마산의 재력가였던 유지락이 1,400원을 설립자금으로 기부하면서 오동동의 상남천 부근에 재설립된다. 소속기생은 60명으로 증가하였고, 대표이사는 유지락이며, 실제 운영자는 권홍순이었다. 입학금은 5원으로 4년 과정으로 시문·음곡·습자·가무·예의를 익혔다. 이들을 지도한 선생은 오바돌, 장행진, 김덕진, 조동선 등이 있다. 남선권번의 소속 기생 중 김애정을 제외한 나머지 기생들에 대한 활동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남선권번은 1939년 9월 30일자로 당시 운영자였던 권홍순의 부채처리와 풍기문란을 이유로 경영권이 취소되고, 10월 7일 남선권번의 채권자들이 동업 형식의 주식회사로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소속 기생들은 주식회사라는 체계적인 경영아래 더욱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권번도 그러한 이익창출을 통해 규모를 더욱 확장 할 수 있었다.
마산예기권번은 해방 이전 마산의 유일한 권번이자 마지막 권번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교육활동과 권번의 기본적인 활동 이외에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권번에서 배운 기예를 공연을 통해 대중들에게 선보였을 뿐 아니라 공연을 통한 수익금 기부 등을 통해 사회에 직접적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토산장려운동, 기부활동, 국악경연대회참여 등으로 지역사회와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역의 문화예술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단순히 기예를 선보이는 것에서 벗어나 권번에서 익힌 학문과 예술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This study examined the establishment and management of Kwonbeon (a management office that supports and finds jobs for gisaengs, Korean geishas) and the activities of gisaengs in Masan area based on newspaper articles, considering that there have been few studies on Kwonbeon in Masan area and its activities has not even been known.
There were Namsun Kwonbeon and Masan Yegi Kwonbeon in Masan area. These two are the same Kwonbeons. After the dissolution of the Namsun Kwonbeon, was established, later replaced by Masan Yegi Kwonbeon. Namsun Kwonbeon, suspected to be founded in 1919, was located in the most bustling area near Gumasan Station. Sponsored by various forces in the region such as local worthies, Namsun Kwonbeon could exist amid conflicts with Munchang Kwonbeon and Masan Yegi Association. Namsun Kwonbeon was dismissed on the February 7, 1930 by the direction of Masan police chief. In October 1931, 20 months after that, established with Ji-rak Yu's investment of 1,400 won for its foundation. It was located near Sang-Nam stream in Odong-dong. Forty something gisaengs in the beginning had increased in number to over 60 by 1939. The representative director was Ji-rak Yu and the actual administrator was Hong-soon Geon. Tuition was 5 won, and learners studied poetry and prose, musical performance, calligraphy, singing and dancing, and etiquette. Teachers there were Ba-dol Oh, Haeng-jin Chang, Duck-jin Kim, and Dong-seon Jo who were nieces of Man-gap Song. From them, gisaengs in learned pansori, gayageum, and gayageum byungchang. However, Namsun Kwonbeon had its management right cancelled on September 30, 1939 for reasons of liability treatment of the then administrator, Hong-soon Gwon, claims for self-restraint, and corruption of public morals.
The move to establish Masan Yegi Kwonbeon started on October 7, 1939, Gisaengs there could have stable activities under the systematic management of a corporation, and Kwonbeon would have been able to further expand the scale through such profits. Masan Yegi Kwonbeon is thought to be the last Kwonbeon in Mas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Gisaengs had a variety of activities in addition to educational and other basic activities. Gisaengs, who served the role as the successors to traditional art, presented the art they learned at Kwonbeon, to the public through performances. Besides ordinary performances, they had 'performances for the flood victims', 'performances for disaster victims', 'performances for famine relief', and 'performances for Korean residents in Manchuria'. The performances and plays of gisaengs are related to social participation. Especially, donating the profits gained from performances to society was not a mere act of showing off their talent and artistry or an act of making a living, but it was a direct social participation by contributing to the society and the public with service spirit. In addition to this, gisaengs actively participated in local community and national movement through activities like promotion of local products, donations, and gukak, Korean classical music contests. Such activities of gisaengs had a significant impact on local culture and art, and society. Also, they are believed to have affected the transmission of gukak in Masan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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