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

탐라문화 update

  •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 : 인문과학분야  >  민속학
  • : KCI등재
  • :
  • : 연속간행물
  • : 연3회
  • : 1226-5306
  • :
  • :

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82)~57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568
탐라문화
57권0호(2018년 02월) 수록논문
최근 권호 논문
| | | |

KCI등재

1탐라 건국신화에 보이는 3신녀(神女)의 역할과 위상

저자 : 채미하 ( Chai Mi-ha )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탐라문화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7-36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탐라 건국신화에 보이는 3신녀의 역할과 그 위상을 한국 고대 건국신화와 비교하여 탐라 건국신화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살펴본 것이다. 탐라 건국신화의 내용은 지상에서 솟아난 3신인과 바다를 건너온 3신녀가 혼인하여 탐라 사회가 변하였다는 것이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에서는 시조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탐라 건국신화에서는 3신인이 아닌 3신녀가 그 역할을 하였고 3신녀가 탐라에 온 이유는 건국과 관련 있다고 하였다. 탐라 건국신화에서 3신녀가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가락국의 허황옥, 신라의 탈해와 비교된다. 3신녀는 탈해와 같은 卵生은 아니었지만, 函에 담겨 출자처와는 다른 변화를 겪으면서 바다를 건너왔고 3신녀의 출현으로 수렵사회였던 탐라는 농업과 목축사회로 전환되었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의 유화와 알영은 江·井과 연결되어 있는데, 물의 기본적 속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바다, 江·井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여성신은 사회의 변화와도 관계있다고 하였다. 한편 3신인에 대한 추숭은 16세기 이전까지는 무속적인 제사였지만, 이 후 유교적 의례로 변하였다. 그리고 3신녀가 五穀種子를 가지고 왔다는 점에서 3신녀는 穀母神的성격을 지녔고 한국 고대 건국신화의 유화나 선도산 신모처럼 神母 혹은 聖母로 추앙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탐라 건국신화의 3신인과 3신녀의 추숭은 한국 고대 건국신화의 시조와 시조비(모)가 국가제사의 대상이었던 것과 비교된다고 하였다.


This thesis is studying about the role and status of 3 goddesses in the birth myth of Tamla comparing with the ancient birth myth. The story of the birth myth of Tamla is that 3 gods from earth married 3 goddesses who came across the sea and the society changed. In the ancient birth myth in Korea, the progenitor changed the society but in the myth of Tamla, not 3 gods but 3 goddesses did that role. So the reason 3 goddesses came to Tamla was related to the establishing nation. 3 goddesses' crossing the sea could be compared with Huh Hwangok of Karakguk and Talhae of Silla. Though their births were not out of eggs, they came across the sea contained in going through changes different from descent and after their arrival at Tamla, the society getting food by hunting and gathering changed to the one of agriculture and livestock farming. In the birth myth in ancient Korea, Yuwha and Alyoung were related with the river and the well. Each the sea, the river, and the well is the space containing water of which inherency is changing ceaselessly and that represents the change of the society. 3 gods and 3 goddesses in Tamla must have been worshipped after their death and this could be compared with that the progenitor and progenitor consort(mother) in the ancient birth myth in Korea were the subjects of the national rites. The worshipping 3 goddesses was a Shamanistic rite but later changed to a confucian ceremony. The fact 3 goddesses brought 5 grains and seeds shows they have the character of mother goddess of grains and they were worshipped as the mother goddess or saint mother like Yuhwa and Seondosan mother goddess in Korean ancient birth myth.

KCI등재

2탐라(耽羅) 전기(前期)의 취락구조(聚落構造)와 사회상(社會相)

저자 : 김경주 ( Kim Kyoung-ju )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탐라문화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7-85 (49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탐라시대 전기의 거점취락은 경계석축, 공동 창고군, 공공 건물지, 특수목적 주거지, 석조우물의 축조와 같이 이전에 없던 차별화된 취락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타날문토기의 영향으로 표준화된 외도동식토기가 출현하고 곽지리식토기로 발전한다. 취락내 사회구조를 살펴보면 우선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했던 공인집단과 표준화된 토기제작의 전문 장인집단, 수공업 생산집단, 대외교역의 수행집단 등으로 이루어진 분업화된 사회조직을 구성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사회구성원을 통제하기 위한 상위계층의 존재도 상정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탐라 전기 사회는 분업화된 전문기술집단과 수장층이 존재하는 위계화된 취락사회로 해석되며 이는 바로 탐라정치체의 등장을 시사한다. 탐라 전기의 취락사회는 전남지역이 백제에 영역화되는 6세기 중반 이전까지 서남부권역의 마한세력을 거점으로 남부 가야와의 대외교역 루트를 통해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맥락은 3~5세기대 제주에서 출토된 외래계토기가 대부분 마한계토기이고 소가야계토기가 일부 동반되는 것으로 입증된다. 탐라의 상위계층은 안정적인 철수입과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다양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지역의 제소국과 교섭을 갖고 다원적인 외교활동을 지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The base settlements of the former half of the Tamra period show differentiated settlement structures not found in the previous period such as boundary stonework, joint warehouses, public building sites, special-purpose residence, and stone wells. In addition, the Oidodong-type pottery, which was standardized by the influence of the paddling-patterned pottery, emerged and developed into the Gwakjiri-type pottery. As for the social structure within the settlement, they formed a specialized social structure consisting of the group of public figures in charge of large-scale public works, the group of professional artisans in charge of standardized pottery production, the group of manual industry-based production, and the group of overseas trade. It is estimated that there was an upper class to control these members of the society. As mentioned earlier, the society during the former half of Tamra is interpreted to have been a hierarchical settlement society with specialized professional technical groups and the ruling class, which implies the emergence of the Tamra political body. The settlement society during the former half of Tamra had active exchanges with Southern Gaya via the overseas trade route with its base in the Mahan force in the southwestern region until the middle sixth century when the Jeonnam region was incorporated into the territory of Baekje. This context is verified by the fact that most of the foreign pottery excavated in Jeju in the third to fifth century was the Mahan-style pottery with the Sogaya-style pottery accompanying it in some cases. It is estimated that the upper class of Tamra had negotiations with small states in the southern parts of the Korean Peninsula and continued its pluralist diplomatic activities with them in order to ensure the stable import of iron, introduce advanced civilization, and obtain various pieces of information.

KCI등재

3고대(古代) 탐라국(耽羅國) 연구의 쟁점과 이해방향

저자 : 장창은 ( Jang Chang-eun )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탐라문화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87-121 (35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고대 탐라국에 대한 호칭은 '州胡'에서부터 '耽羅'·'託羅(托羅)'·'?羅'·'涉羅', 그리고 '耽牟羅'까지 다양한 표기로 사서에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 모두를 동일 대상인 탐라국에 대한 이표기로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耽羅와 『魏書』 고구려전에 나오는 '涉羅'의 실체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三國志』 東夷傳의 韓傳에 나오는 州胡는 '오랑캐 마을' 내지 '섬 오랑캐'로 해석된다. 문면으로 보았을 때 중국 측에 의한 타칭이다. 『後漢書』 東夷列傳에는 州胡國으로 표기되어 있어 탐라국 이전 제주의 고대국가에 대한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주호국이 제주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한 연구자는 없다. 다만 주호가 교역한 韓中의 실체는 연구자 간 견해 차이가 있다. 韓의 실체 규명은 주호가 제주로 비정될 수 있는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 제주시 산지항에서 출토된 貨泉등 王莽錢은 주호국이 1세기 대에 중국과 교류했음을 시사한다. 중국 화폐의 한반도 유입은 본토와의 직접적인 교역보다는 漢郡縣(樂浪郡)을 매개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주도가 漢郡縣과 弁·辰韓-倭로 이어지는 교역경로 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산지항과 용담동·삼양동 등에서 화폐와 철제 무기류·옥환 등 중국이나 진·변한 계통의 위신품이 출토되는 까닭은 주호국이 이들의 교역체계에 능동적으로 동참했기 때문이다. 주호국의 교역범위는 전남지역의 마한을 중심으로 진·변한 지역을 망라하였다. 제주도산 토기가 나주시 수문 패총, 해남 군곡리 유적, 사천 늑도에서 출토된 것은 그 실증적인 고고자료이다. 제주의 고대국가가 耽羅國으로서 한반도 국가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三國史記』 백제본기가 최초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5세기 후반인 문주왕~동성왕대에 탐라국은 백제에 공납을 바치는 종속관계에 있었다. 이와 달리 『日本書紀』에는 탐라와 백제의 통교가 508년에 처음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기왕에는 백제본기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면에는 백제가 4세기 후반인 근초고왕대에 전남지역까지 진출해 영역지배 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다만 백제본기의 탐라를 제주도로 보는 데 회의적인 견해도 있다. 『일본서기』의 해당 기록이 백제계 계통이어서 사료가치가 높다는 점, 동성왕이 정벌하려 했던 耽羅가 제주도라면 무진주[광주]에 도착한 백제 군사에 대해 탐라가 스스로 와서 죄를 빌었다는 내용이 어색하다는 점 등이 고려되었다. 그 결과 백제본기의 탐라를 전남 강진과 해남지역에 있었던 소국으로 비정하였다. 백제본기 탐라의 실체는 향후 검토할 여지가 남아 있다. 『魏書』 열전 고구려전에 따르면, 504년에 고구려 문자명왕(491~519)이 북위 선무제에게 사신을 보내 그동안 조공했던 황금과 珂를 더 이상 바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황금은 夫餘에서 나고, 珂는 涉羅에서 나는 것인데, 부여는 勿吉에게 쫓기는 바가 되었고, 섭라가 백제에게 병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涉羅'의 실체이다. 한진서가 『海東繹史』에서 '섭라'를 제주로 비정한 후 많은 연구자들이 이를 계승 하였다. 특히 珂를 말 재갈 장식에 사용하는 소라와 전복으로 보거나, 마노로 보되 그 생산지를 제주도로 이해하였다. 이와 달리 珂를 (백)마노로 보거나, 涉羅[신라]가 백제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珂를 바칠 수 없다는 문구도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탐라의 관계를 입증해 줄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점, 『晉書』 부견전에 사용된 신라 국호 '薛羅'가 '涉羅'와 음운상 같다는 신경준의 주장에 근거해 涉羅=新羅일 가능성이 마련된 점, 珂의 실체가 말 재갈 장식보다는 옥의 범주에 포함되는 마노가 더 유력하다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涉羅'는 제주도보다는 신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하다.


The Name for Tamna was recorded variously 'Juho(州胡)', 'Tamna(耽羅)', 'Takra(託羅)', 'Damra(?羅)', 'Tammora(耽牟羅)', 'Seobra(涉羅)' etc. First of all, The Juho(州胡) recorded in Samgukji Dongijeon(三國志東夷傳) is almost certain that now Jeju-do. Juho-guk made an exchange with Three Han States(三韓) in 1st to the 4th century. The important exchange goods Juho-guk gained was iron prestige, Chinese Coins, salt, etc. According to Samguk Sagi (三國史記), Tamna(耽羅) paid tribute to Baekje in the late 5th century. But At this time of Tamna was unsured whether to Jeju-do. Some researchers argued that Tamna located in Gangjin and Haenam region, Jeollanam-do. The Recorded in Weisue(魏書) for Seobra(涉羅), Many researchers think the substance is Jeju-do. Because They understood that Ga(珂) is Products made of Abalone or Conch. But Ga(珂) may be Agate or Jade. Seobra(涉羅) was used for the name of Silla. Therefore The substance of Seobra(涉羅) Silla as it might be appropriate.

KCI등재

4백제 위덕왕(威德王)·무왕대(武王代) 대고구려(對高句麗) 견제의 외교적 함의

저자 : 선봉조 ( Seon Bong-jo )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탐라문화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25-161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갈등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두 나라의 전면적인 대립은 4~5세기의 절정기를 지나 6세기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었다. 553년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부터는 이러한 양국의 관계에 변화가 동반되는 듯 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그토록 얻고자 했던 한강유역이 신라로 넘어가게 된 상황에서 서로 간의 대립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백제와 고구려는 7세기 전반까지도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598년과 607년 백제 위덕왕과 무왕은 각각 隋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고구려 역시 즉각적인 보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백제와 대립각을 세웠다. 또한 626년에는 백제가 唐에게 고구려의 조공로 방해를 하소연하면서 중재를 요청하는 등 두 나라의 관계가 대립적이었던 것으로 사료에 나타난다. 기존연구에서는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고구려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던 것으로 인식했다. 그렇지만 당시에 보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대립은 세력균형이라는 국제관계의 속성에 부합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백제와 고구려가 얻고자 하는 목표를 신라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국 간의 전쟁은 고구려-신라, 백제-신라 사이에서 발생되고 있었다. 이러한 의문점에 착안하여 위덕왕과 무왕의 對隋外交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그것은 2단계의 과정을 거쳐 추진된 사행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는 1차 사행을 통해 고구려와 隋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음을 확인했고 이후 2차 사행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견제의사를 隋에 피력했던 것이다. 즉, 애초부터 고구려 견제를 목표로 한 사행이 아니라 통상적인 외교의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후속조치 차원에서 추진된 외교였다. 그러다보니 위덕왕의 경우에는 고구려-隋전쟁이 끝난 시점에 고구려 정벌의 軍導가 되기를 청하는 등 중대한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백제가 본래 의도했던 목적은 隋와의 관계 개선이었다. 위덕왕의 경우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뒤쳐진 국가적 위상, 隋로부터 조공을 거절당하는 등의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무왕은 아막성 전투의 참패, 가뭄과 기근 등 대내외적 악재들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때에 隋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인다는 소식을 접하자 백제는 고구려 정벌에 동참한다는 외교적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隋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이것이 사료에서는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견제로 비춰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덕왕과 무왕의 대고구려 견제는 고구려에 대한 직접적인 견제였다기보다는 대수관계의 개선을 목적으로 한 외교전술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598년과 607년 백제 대수외교의 외교적 함의를 도출할 수 있다.


Since the 4th century, Baekje and Koguryo have come into conflict against each other because of the hegemony of the Hangang River(漢江) basin. After Silla(新羅) occupied the Hangang River Basin, relations between Baekje and Koguryo were expected to change. As both countries did not share common border any more, they seemed to change their main enemy to Silla. By the way, contrary to general expectation Baekje and Koguryo continued to fight until the first half of the 7th century. King Wideok(威德王) and King Mu(武王) tried to hold Koguryo in check in 598 and 607 each. Previous studies accepted that Baekje needed to hold Koguryo in check to attack Silla effectively. However, the conflict between Baekje and Koguryo does not correspond with the nature of balanced power. Since Silla controlled the Hangang River basin that Koguryo and Baekje wanted so much, the two countries had to consider Silla as the target of the attack. Actually most of the combat occurred between Baekje and Silla or Koguryo and Silla. There was no practical benefit that Baekje and Koguryo could be gained by keeping each other in check. On analyzing the dispatch of envoys of Baekje toward Sui dynasty, I could find out that it had been carried out as two-step process. Firstly, Baekje sent an ordinary envoy to Sui dynasty and got the information that Sui dynasty try to attack to Koguryo. On the basis of this information, Baekje dispatched special envoy who ask for attack to Koguryo to Sui dynasty. If Baekje had tried to threaten Koguryo from the start, it would have expressed its intention long before the war ended. But Baekje suggested their willingness to participate in the war between Sui dynasty and Koguryo after the end of the war. This was the result of a lack of willingness and information of war situation. The main purpose Baekje intended was not the check to Koguryo but promoting friendship with Sui dynasty(隋). Around 7th century, as Baekje was diplomatically isolated, a breakthrough to resolve a crisis was needed. So Baekje took advantage of an opportunity of conflict between Sui dynasty and Koguryo. This very thing was expressed as a check against Koguryo.

KCI등재

5『삼국유사(三國遺事)』 소전 변재천녀와 통일신라범종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의 연관성

저자 : 강현정 ( Kang Hyun-jung )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탐라문화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63-199 (37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고는 『三國遺事』의 '朗智乘雲普賢樹'와 '緣會逃名文殊岾'에 등장하는 다소 낯선 존격인 辯才天女에 대한 시론적 접근에서 출발하였다. 불교경전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문헌자료에서도 확인된다는 점에서 당대 현실사회에서 신앙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변재천녀신앙은 어떻게 구체화되었을까. 이에 대한 의문점을 풀어가고자 소의경전과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 및 통일신라시대 범종에 나타나는 주악천인상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 힌두의 '사라스바티'에서 출발한 '변재천녀'는 불교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辯才天·辨才天', '美音天', '妙音天', '妙音菩薩' 등으로 한역된다. 언어와 학문, 예술과 음악을 주재하는 존격으로서, 도상적으로는 무기류를 비롯한 다양한 지물과 함께 등장하는 多臂像과 비파를 연주하는 二臂像으로 그려진다. 음악이란 기본적으로 '소리'에서 출발한다. 도구를 가지고 音과 律을 만들어내면 그것은 음악이 된다. 사람의 성대로 소리를 만들어 내면 그것은 말소리가 되고 眞言이 되며 念佛供養이 된다. 언어와 학문, 예술과 음악을 주재하는 변재천녀(묘음보살)는 『法華經』에서 소리공양, '樂供養'을 통해 선업을 쌓은 존재로 그려진다. 바로 이점에서 '주악천인상'과 '변재천녀'와의 연관관계를 그려볼 수 있다. 문헌사료에 나타나는 변재천녀신앙이 당대의 현실세계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 즉 오늘날 '주악천인상'라 일컬어지는 형태로 구체화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주악천인상 조성의 사상적 연원을 『法華經』·『金光明經』·『金光明最勝王經』 등에 근거를 둔 변재천녀(묘음)와의 연관관계에서 찾는다면, 지금까지 단순히 장식적·문양적 측면에서만 해석되어오던 이들 '주악천인상'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본고의 출발점이었던 『三國遺事』 문헌기록의 변재천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 신앙세계에 나타났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함과 동시에 그동안 미학적 의미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던 주악천인상의 사상적 연원, 조성의 근본적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This research is focused on searching for the correlation between Byeonjaecheonye(辨才天女) to Juackcheninsang, Heavenly Figures(奏樂天人像) on the Buddhist bells of the United Silla. Byeonjaechenye originated from Sarasvati, a river goddess in Hinduism. Sarasvati, which is Sanskrit, appears with Heavenly Lute and was translated into Byeonjaecheon(辨才天辨財天), Mieumcheon(美音天), Myoeumcheon(妙音天), Myoeum Bodhisattva(妙音菩薩) in the Chinese Buddhist Scriptures. When Buddhism was introduced during the Three Kingdom era in Ancient Korea, Byeonjaecheonye was also introduced and there were two articles that referenced it in the Samkukyusa(『三國遺事』), The Heritage of the Three States. The existence of these references may imply that there was belief in Byeonjaecheonye during this time. On the other hand, there was Juackcheninsang, Heavenly Figures(奏樂天人像) found on the Buddhist bells of the United Silla. In Buddhist art iconology, the Heavenly figures are usually depicted as subordinated figures for depicting the main figures Buddha and Bodhisattva, and are described as musicians; However, Juackcheninsang, the Heavenly figures can be rooted from Byeonjaecheonye belief based on Buddhist scriptures. This article mainly suggests the possibility of the correlation between Byeonjaecheonye and Silla's Juackcheninsang, Heavenly Figures.

KCI등재

6조선시대 제주인의 표류 발생 배경과 실태

저자 : 김나영 ( Kim Na-young )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탐라문화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01-240 (4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논문은 조선시대 濟州島라는 특정 공간을 중심으로 濟州人들이 해상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가운데 예기치 않게 발생하였던 海難事故중 '漂流'라는 일련의 사건에 주목하였다. 이를 위해 국내·외 사료 속에 단편적으로 산재해 있는 제주도 표류 관련 사례들을 우선 정리, 연표로 작성함으로써 보다 通時的이고 共時的인 안목을 기반으로 제주도를 중심으로 전개된 漂流史의 전체상을 파악하였다. 아울러 표류 제주인들의 항해 전말을 담은 問情기록을 통해 제주인들의 표류 발생 배경을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봄은 물론, 그 실태를 계량화하여 파악해 보았다. 본고에서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조선시대 제주해역을 둘러싼 표류가 어떠한 배경과 요인에 의해 발생되었는가를 우선 살펴본 결과, 제주도는 邈在海外·四海孤島의 火山島이자 强風多風의 섬, 육지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進上品과 貢物의 생산지라는 자연지리적 입지조건과 더불어 그에 수반되는 護送등 조선조의 정치·사회·경제적인 복합적 제반 상황에 기인하여 제주인들은 자의적·타의적으로 바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표류라는 일종의 우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해난사고에 노출될 가능성이 컸다. 전근대 제주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諸國들의 해상교류에 있어 어느 정도의 해양환경을 이용한 경험과 지식이 축적되어 일정한 항로가 형성되어 있었으나, '礖'라는 제주바다 주변의 독특한 해저지형과 제주도를 둘러싼 바람(계절풍)·태풍·해류·조류 등이 기존 해상활동의 고정적 틀을 파괴시키는 變數로 작동하여 제주도 해역을 오고 가는 선박들의 표류를 유발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이러한 배경 속에 발생되었던 조선시대 제주인들의 표류 실태를 각종 사료를 통해 '出海-漂流-漂着-送還'이라는 표류 顚末을 역추적하여 그 발생 규모와 빈도를 시계열적으로 파악한 결과, 제주인들은 365건·4,427명[사망자 760명]이 해난사고와 직면하였고, 이들 중 82.8%에 해당하는 3,667명은 해난사고로 말미암아 일본·유구·중국·대만·안남 등지로 표류해 그곳 국가들로부터 구조·송환되어 본국으로 살아 돌아왔음이 확인되었다. 단편적으로 잔존해 있는 역사적 기록 자체에 의거한 통계이지만, 80%를 웃도는 높은 생존율을 본다면 전근대 시기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상호 호의에 입각한 표류인 송환체제가 작동되어지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요컨대 본 연구 결과를 통해 그동안 단편적으로 연구되어 왔던 제주도의 漂流史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조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며, 향후 본고에서 파악한 제주인의 표류 실태를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표류 제주인의 존재적 의미를 해명함은 물론, 당시 제주인들의 해상활동 양상과 함께 제주사회의 경제구조 실태를 재조명해 나가고자 한다.


This paper focuses on a chain of events, 'drift', among maritime accidents that had occurred while the Jeju Islanders were conducting maritime activity in a specific location, Jeju island. The cases related to drifting in Jeju Island, which were scattered in domestic and international historical records, were summarized and chronologically organized. By doing this, the history of drift focused on Jeju Island could be identified based on diachronic and synchronic perspective. With this reference, the background of drift occurrence of Jeju Islanders and its real conditions could ultimately be understood. Through a record of Munjeong, which includes full account of the drifted Jeju Islanders' voyages, the aspect of Jeju Islanders' maritime activities and an economic structure of Jeju society were examined. The results of this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occurrence of drifted Jeju Islanders was caused by the distribution of unique submarine topography such as coral reef around the Sea of Jeju. As the winds (seasonal winds), typhoons, ocean currents, and tidal currents surrounding Jeju Island, it acted as variables to destroy the fixed framework of existing maritime activities and caused the drifting vessels around the Jeju Island. Moreover, the tax collecting system became intensified after the 15th century and there were some local products that could not be replaced with products in land. To prepare local tribute and tribute to the King for each period and for its transportation, it became unavoidable for the Jeju Islanders to go out to the ocean. Due to this reason, they had high chance to be exposed to unexpected marine accidents such as drift. Second, through studying the actual situation of drifting of Jeju Islanders in the Joseon Dynasty from many references, the full account of drifting was back-tracked as 'Go out to sea-Drift-Drifting ashore-repatriation'After examining its occurrence scale and frequency as time sequence, 365 times 4,427 Jeju Islanders [760 deaths] faced with the marine accidents. Among these, 82.8%(3,667) of Jeju Islanders came back alive because they were rescued and repatriated after they became drifted to Japan Ryukyu Kingdo m China Taiwan Annam because of the marine accidents.

KCI등재

7조선시대 제주지역 편액현판(扁額懸板) 연구

저자 : 오창림 ( Oh Chang-rim )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탐라문화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41-272 (32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이 논문은 제주지역에 유존하는 조선시대 양식의 주요한 편액현판 11점에 대해 분석하였다. 편액서를 쓴 인물의 신분유형을 보면, 제주출신과 유배객 그리고 목민관 및 중앙관원으로 나눌 수 있다. 제주출신의 글씨로는 고득종(1388-1452)의 <홍화각>, 정상명(?-?)의 정의향교 <명륜당>, 김용징(1809-1890)의 제주향교 <계성사>가 있고, 유배객의 글씨는 김정희의 대정향교 <의문당>, 제주목 <연희각>, <은광연세>가 있고, 목민관의 글씨로는 김영수(1716-1786)의 <탐라형승>과 박선양(?-?)의 <호남제일정>이 있으며, 제주와 특별한 연고가 없는 중앙관원의 편액서로 이산해(1539-1609)의 <관덕정>과 이종우(1801-?)의 제주향교 <계성사>가 전하고 있다. 제주지역에는 공공건물 이외의 조선시대 편액현판이 아직까지 전해진 예는 거의 없다. 현판양식의 변화는 후기로 갈수록 테두리목을 덧대고 현판 주변부에 문양장식이 가미되긴 하지만 여전히 단순하고 검소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반도의 편액현판의 경우, 장엄과 장식을 통해서 위세를 드러내는 궁중이나 사찰 또는 사대부가의 유물로 상당부분 차지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제주의 경우는 아마도 관가나 일부 규모가 큰 사찰을 제외하면 대부분 초가집이었다는 점과 반도와는 달리 누정문화가 거의 없었던 지역적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왕조교체기 및 端宗의 폐위를 계기로 자발적으로 입도한 제주지역의 문화지배층이라고 할 만한 선비들의 은둔자적 삶의 태도가 적잖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This paper examined the main Pyeonaek inscriptions in Jeju area during the Joseon Dynasty. Eleven Pyeonaeks, one of the most important Pyeonaek inscriptions in the area, were analyzed. According to the identity type of the person who wrote the letter, you can split it into those from Jeju Island, the betters, the sheeters, the shrokers' office, and the central government. Jeju has seen few Pyeonaeks from the Joseon Dynasty, other than public buildings. The changes in the style of the signboard are simple and simple, although the frame is overlaid with frills and a motif is attached around it. This is in contrast to the considerable portion of the Pyeonaek of the peninsula, which is used as a relic of a royal court, a temple, or a footstall to reveal its authority through grandeur and decoration. Jeju's case is most likely due to its state-owned appearance, except for government buildings and some larger temples, while its local characteristics, unlike the peninsula, are due to its lack of Nujeong culture. In particular, it seems to reflect the attitude of the reclusive elite, who are considered the cultural leaders of Jeju, following the replacement of the emperor and the expulsion of the Emperor from the Emperor.

KCI등재

8제주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활용방안

저자 : 강만익 ( Kang Man-ik )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탐라문화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273-306 (34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최근 지방자치단체는 독립운동 사적지를 지역민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장소로 이용하거나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삼고 있다. 이 글은 2017년 12월 말 현재 제주지역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148명에 대한 현황분석과 그들의 활동거점인 독립운동 사적지의 활용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148명 독립유공자 공적개요를 중심으로 파악한 독립운동 양상은 국내항일운동(82), 일본방면활동(19), 3·1운동(18), 학생운동(18), 의병(4), 문화운동(4), 광복군(1), 애국계몽운동(1), 임시정부(1) 순으로 나타났다. 독립유공자 훈격 현황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은 해당자가 없으나, 건국훈장에 속하는 애국장(21)과 애족장(79) 그리고 건국포장(21), 대통령표창(27)이 확인됐다. 148명이라는 독립유공자 수치는 『제주항일인사실기』(2005)에 기재된 독립운동인사 500여명의 30% 정도에 불과해 추가 자료발굴을 통해 독립유공자 지정을 확대했으면 한다. 제주지역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계열에 속하는 의병운동,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 만세운동에서부터 시작해 1920년대 후반부터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실현을 지향하는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사회주의 계열에는 신인회, 신간회, 제주청년동맹, 제주야체이카, 제주적색농업조합이 대표적이며, 무정부주의를 표방했던 아나키즘 계열에는 우리계(宇利契)가 있었다. 제주지역 독립운동 사적지를 가지고 다크투어리즘을 활용한 역사관광상품 개발, 항일독립운동 아카이브 구축, 스토리텔링과 콘텐츠 개발, 청소년 보훈캠프 등 활용방안이 필요하다. 이 글이 제주지역 독립운동사 연구를 유도하고, 현재 방치되고 있는 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This study analyzes the independence movements carried out by 148 persons of distinguished service to independence in Jeju region and suggests a method to utilize independence movement historical sites. The result of this study and issues for further study are as follows: First, as of December 2017, there are 148 people recognized as the person of distinguished service to independence in Jeju region, and they account for only 30% Third, it is necessary to find materials to prove the activities of independence activists. To this end, it is necessary to put in experts specialized in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and to find materials on the persons who participated in Patriotic Enlightenment Movement, Cultural Movement, New Education Movement and others but failed to be recognized as the person of distinguished service to independence. In particular, it is necessary to find materials about Kang Pyeong-guk, who was a female independence activist, Im Do-hyeon, who was a Jeju anti-Japan pilot, and the people involved in the Fishermen's Struggle Against Japanese in Chujado Island. Fourth, it is necessary to change the recognition of independence movement historic sites. It is necessary to brand the sites and make them 'a place to visit' or 'a place to stay' by revitalizing the entire sites rather than just to keep them as historic sites or cultural properties. Fifth, it is necessary to develop history tourism products and services related to dark tourism, establish anti-Japan independence movement archives, develop storytelling and historical and cultural contents, and establish a youth patriot camp by utilizing the independence movement historic sites. Further, it is worth establishing the networks between historic sites and civil societies, fostering the commentators of anti-Japan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and linking the regeneration of old downtowns and the revitalization of villages in Jeju. Sixth, it is required to strengthen the role of Jeju anti-Japanese Memorial Museum. Approximately 350 people who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are not yet recognized as persons of distinguished service to independence due to the lack of evidence. In order to help them to be recognized as persons of distinguished service to independence, Jeju anti-Japanese Memorial Museum should actively hold independence movement-related academic seminars, establish a support system for independence movement researchers, and expand the employment of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specialists as curators, beyond performing facilities maintenance and repair. Finally, in order to protect and preserve Jeju independence movement historic sites, the following are needed: the active involvement of the residents in villages where historic sites are located; the participation of youth and students; and great efforts of civil societies, Jeju history research groups, Jeju Research Institute and Jeju Anti-Japanese Memorial Museum.

KCI등재

9우리나라의 도깨비 도로-심리학적 설명과 활용 제안

저자 : 오성주 ( Oh Song-joo )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탐라문화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07-344 (38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도깨비 도로는 실제 경사와 반대로 지각되는 현상이다. 도깨비 도로는 전 세계적으로 보고되며 한국에서도 다수가 알려져 있다. 해외에서 도깨비 도로는 관광뿐만 아니라 학문적 연구 대상이다. 그에 비해서 우리나라에서 도깨비 도로를 학문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부족하다. 본 연구에서, 제주도 사례를 포함하여 우리나라에서 도깨비 도로로 알려진 20개의 도로를 전수 조사하였고, 이 가운데 17개를 중심으로 왜 착시가 일어나는지 심리학적으로 설명을 하였다. 조사 결과, 모든 도깨비 도로는 평균 1~2° 사이의 낮은 경사를 보였고, 주요 원인으로 나무나 가로등 같은 도로 주변의 물체에 의한 맥락, 이웃한 도로끼리의 경사 대비를 지목하였다. 끝으로, 조사를 토대로 도깨비 도로를 관광 산업의 관점에서 좀 더 슬기롭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The antigravity hill is a visual illusion that people incorrectly see a uphill as downhill or vice versa. This illusion is reported all over the world including Korea, and attracts many tourists. In this study, all antigravity hills to be reported in Korea were surveyed to understand in terms of previous theories. In the results, 17 cases were found and their geographical conditions were examined. The slope contrast between neighboring roads, the visual disconnection of the end of a road, and contextual height from nearby objects such as trees and houses were pointed out as the main causes of antigravity hills. Largely, the slopes were as low as about 1~2°, which suggests that the illusion may occur where the slant is not evidently detected by the eye-level based on the proprioceptive senses. Lastly, I discussed how to explain the phenomenon better for tourist and the ways to take care of the roads to show more powerful illusion.

KCI등재

10호텔 직원의 감정노동이 친사회적 서비스 행동에 미치는 영향 : 심리적 임파워먼트 조절효과-제주지역 호텔종사원을 대상으로

저자 : 백정민 ( Baek Jeong-min ) , 조문수 ( Cho Moon-soo )

발행기관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간행물 : 탐라문화 57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345-374 (30 pages)

다운로드

(기관인증 필요)

초록보기

본 연구는 호텔 조직 내 감정노동과 친사회적 서비스 행동과의 관계에서 심리적 임파워먼트가 조절효과를 나타내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연구 모형을 설정하고 실증분석 하였다. 주요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호텔 직원의 감정노동과 친사회적 서비스행동의 관계에서 심리적 임파워먼트의 하위 요소인 의미성에 준조절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호텔 직원의 감정노동과 친사회적 서비스행동의 관계에서 역량성은 준조절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호텔 직원을 대상으로 한 감정노동과 친사회적 서비스행동의 관계에서 자기결정성은 준조절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분석 결과를 근거하여, 심리적 임파워먼트 하위변수 중 유의한 영향을 미치는 조절변수를 조직적 차원에서 직무교육이나 교육훈련 프로그램으로 개발하여 활용한다면 직원들의 직무과정에 필요한 역량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직원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 역량 개발하고 향상시켜 현장에서 직원 스스로 자율경영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is about the controlling effect of psychological empowerment in the relation between emotional labor and pro-social behavior of hotel employees in Jeju. Also, through the empirical analysis, the followings were found in terms of the controlling effect of psychological empowerment related to the emotional labor and pro-social behavior. First, it was found that the controlling effect of the factor of the psychological empowerment: meaningful, Competence, Self-determination, on the emotional labor and pro-social behavior is significant. From the analysis, it can be concluded that Significant factor (meaningful, Competence, Self-determination) of psychological empowerment are utilized for hotel support on an organizational level, such as job training or training programs. In other words, hotel organization have to identifies, develops, and improves capabilities required of the hotel employees for the task process so that it can be motivated to conduct autonomous management on site.

1
권호별 보기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인용된 논문
| | | |
1연안해역에서 석유오염물질의 세균학적 분해에 관한 연구

(2006)홍길동 외 1명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심리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자료제공: 네이버학술정보)

가장 많이 참고한 논문

다운로드

2미국의 비트코인 규제

(2006)홍길동41회 피인용

다운로드

해당 간행물 관심 구독기관

동아대학교 남서울대학교 단국대학교 제주대학교 연세대학교
 180
 140
 118
 102
 64
  • 1 동아대학교 (180건)
  • 2 남서울대학교 (140건)
  • 3 단국대학교 (118건)
  • 4 제주대학교 (102건)
  • 5 연세대학교 (64건)
  • 6 광운대학교 (42건)
  • 7 경희대학교 (40건)
  • 8 부산대학교 (38건)
  • 9 고려대학교 (29건)
  • 10 이화여자대학교 (23건)

내가 찾은 최근 검색어

최근 열람 자료

맞춤 논문

보관함

내 보관함
공유한 보관함

1:1문의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