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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수록범위 : 1권0호(1950)~42권0호(2018) |수록논문 수 : 200
학림
42권0호(2018년 09월) 수록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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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I후보

1월남 개성인의 정착과정과 개성(開城)의 유산(遺産)

저자 : 양정필 ( Yang Jeong-pil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9-4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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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휴전협정 결과 개성은 북한에 편입되었다. 전쟁을 피해 월남했던 개성인들은 실향민이 되어 남한 사회에 정착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월남 개성인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개성의 遺産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개성이 남긴 유산으로는 상업 전통, 인삼 재배 전통, 내부적으로 강한 결속력과 유대감 등이 있다. 이들 유산은 월남 개성인의 남한 정착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상업 전통이 강한 개성 출신인 만큼 월남 개성인 중에는 기업을 경영하거나 상업에 종사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재벌급으로 성장한 이들도 있는 반면 중소 도시의 소규모 상점을 운영한 사람도 있는 등 내부적으로 그 층위는 다양하였다. 대개 그들은 분단 이전 개성상인으로 상업에 종사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 많았고, 그런 경험이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또 월남 개성인들은 기업을 세우고 경영하면서 동향인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그것은 공동 투자의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기업 경영에 조언을 주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졌다.
인삼 재배 역시 월남 개성인이 남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9세기부터 인삼을 재배해 온 개성인에게 인삼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월남 이후 한 동안 인삼을 경작할 수 없었지만, 1957년 개성삼업조합이 재결성되면서 월남 개성인의 삼포 경영이 시작되었다. 전업으로 하는 이들도 있고 공동 투자자로 나선 사람도 있었다. 월남 개성인에게 인삼은 단순한 상품에 그치지 않고 고향과 두고 온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인삼 재배는 월남 개성인이 남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데도 일조하였다.
개성인 내부의 강한 결속력과 유대감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나 미성년자가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0대의 나이에 부모 없이 피난 온 경우, 경제 활동이 뜻대로 되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경우 등 월남 개성인 중에도 고난에 처한 이들이 있었다. 월남 개성인들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를 통해 그들이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월남 개성인은 대체로 남한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였는데, 여기에는 고향 개성의 유산이 큰 역할을 하였다.


The armstice of the Korean War led to the incorporation of Gaesung into north Korea. Those who fled their hometown Gaesung to the south then became displaced, and immediately faced the task of settling in south Korean society. This paper aims to look into the role of Gaesung legacy on the settlement of these people in south Korean society. Gaesung legacy includes commercial tradition, ginseng cultivation, and strong internal solidarity and bond. These qualities played a major role during the settlement of uprooted inhabitants in south Korea.
Due to significant commercial heritage, there were notable people of Gaesung origin who have engaged in entrepreneurship or business. Among those, some grew to the rank of conglomerates, others simply ran small shops in middle or small-size cities, which situations portray a wide range of spectrum. Such phenomenon were mainly attributed to their experiences in pre-division era of the peninsula, when many pursued mercantile operations. Also, Gaesung people of south Korea established companies and helped fellow immigrants. Their cooperation was demonstrated in the form of co-investments, or giving advice on corporate management.
Ginseng cultivation attributed to the economic success of Gaesung people in south Korean society as well. Ginseng was almost their soul since Gaesung locals grew this medicinal plant since the 19th century. After their escape, Gaesung refugees in the south could not raise ginseng until 1957, when Gaesung Ginseng Industry Union was reorganized. Then, some made it their full-time occupation, while others merely acted as co-investors. To Gaesung refugees, ginseng was more than just a commodity, but a memory of everything they left behind in their home including families. Ginseng naturally was also their blessing because its cultivation brought them economic security.
Impressive solidarity and bond of Gaesung people assisted fellow refugees who were poor or non-adult immensely in settling down in south Korea. In case of those teenagers who evacuated without parents, quite a few suffered economic hardships. Those who established themselves in the South aided those in need, and helped desperate hometown immigrants adjust well to south Korean society. Most of Gaesung people successfully settled in south Korea, and Gaesung legacy indeed was the dominant fa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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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50년대 공주 유구지역의 피난민 정착촌 형성과 직조업

저자 : 김세림 ( Kim Serim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47-82 (3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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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피난민의 유구지역 이주 동기 및 정착 과정을 재구성하는 것이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이다. 또한 피난민 정착촌으로서 유구를 다시 보며, 이들의 정착과정에서 작동한 동향인 네트워크의 구체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공주 유구의 피난민 정착 사례는 한국전쟁기 피난민들이 정착지를 찾아간 경로와 자신들만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유구는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500여 가구가 생활하고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벽지였다. 유구에 인구가 급증한 시기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정감록에 나온 십승지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피난민이 살 곳을 찾아 몰려왔다. 보다 직접적 이유는 1950년대 초반부터 유구에 직조업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직물의 절대수요가 증가하고, 직조기의 비중이 동력에서 인력으로 옮겨가면서 1950년대 영세직조업에는 호황기가 왔다. 당시 직물은 생산과 동시에 판매되었으므로 자본으로 빨리 전환되어 피난민들의 지역 정착을 도왔다. 유구에 정착한 황해도민들은 적극적으로 친인척을 유구로 불러와 직조업에 종사하게 하면서 가계를 일구어 갔다. 이들은 전국에서 친척들을 찾아와 집을 지어주거나 수직기를 만들어주는 등 적극적으로 정착조건을 마련해주었다. 그렇게 모인 피난민들은 또 다시 흩어진 가족들을 유구로 불러왔다. 피난민들은 유구에서 교회를 개척하거나 개간을 해 '신설동'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의 동향인 연결망은 친인척 및 혼인관계로 촘촘히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직조업이 있었다. 이들의 연결망을 중심으로 직조공장은 약 250개로 늘어나고 직물조합이 설립되는 등 유구는 피난민들에 의해 활기를 띄어갔다. 그러나 1950년대 정부의 원조배분정책에 수혜를 받은 대규모 면방직공장들이 성장하면서 전국적으로 인견직생산은 급격히 쇠퇴했다. 전력사정이 나빠 수직기로 직물을 생산해오던 유구의 직조업은 크게 타격을 입어 1960년대부터 쇠퇴일로를 걸었다. 그럼에도 피난민들은 짧은 기간 동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구지역에 정착촌을 일구고자 하였으며 1950년대 피난민들이 직조업을 중심으로 유구에 정착해간 과정은 현재 유구에 중요한 지역정체성을 마련해주었다.


The first purpose of this paper is to reconstruct the motives of refugees for migration to Yugu area and the settlement process during the Korean War. This paper also aims to reconsider Yugu as a settlement for refugees and analyze concrete characteristics of networks among refugees from the same provinces during their settlement process.
The refugee settlement case in Yugu, Gongju demonstrates the refugees' process of finding a settlement and creating their own living foundation during the Korean War, in detail. Before the liberation, Yugu was a remote village where about 500 households lived and electricity was not supplied properly.
Before and after the Korean War, the population in Yugu began to rapidly increase and a lot of refugees crowed into this area, since this was mentioned as Sipseungj in Jeonggamrok. A more direct reason was because that starting the early 1950s, the weaving industry began to be formed.
The absolute demand for fabrics rose due to the Korean War and with the shift of the proportion of looms from power to human resources, in the 1950s, small weaving businesses faced prosperity. At that time, fabrics were sold as soon as they were produced and the swift conversion to capital helped refugees settle down in this region.
Refugees from the Hwanghae Province were active in bringing their relatives over to Yugu and they made their livings, engaging in the weaving industry. They provided settlement conditions actively by building houses for their relatives, who were scattered all over the country, or making hand looms for them.
Refugees coming together this way brought their separated families over to Yugu once again. Refugees pioneered or opened Christianity in Yugu and created 'Sinseol-dong'. In that process, the networks among refugees from the same provinces were tightly formed with relatives and in-laws. At its core, the weaving industry functioned.
Yugu became activated by refugees while weaving factories increased to nearly 250 and a weaving association was founded, focusing on their networks. But in the 1950s, large-scale cotton textile factories obtaining benefits from the aid allocation policy of the government grew and rayon fabric production rapidly decayed throughout the country.
Fabric production of the weaving industry in Yugu relied on hand looms because of the poor power condition. For this reason, the industry suffered greatly and from the 1960s, it began to decline. Nevertheless, refugees strived to cultivate a settlement in Yugu area, seizing the opportunity for a short period of time and the refugees' process of settling down in Yugu in the 1950s, based on the weaving industry provided a significant regional identity to Yugu of the presen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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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평양고보 출신 엘리트의 월남과정과 정착지

저자 : 이준희 ( Lee Junhee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83-10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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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고보 출신 월남민들은 스스로 관서의 엘리트로 인식하였다. 이들은 월남 이후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엘리트 월남민의 대표로 스스로를 위치 지었다. 한국사회에서 중산층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면서 이러한 인식은 더욱 공고해졌다. 평양고보 출신으로서 소위 '평고정신'을 무기로 한국사회에 적응했으며 1980년대 이후 사회 각계각층에 인사로 활동하면서 평고 동문회는 더욱 활발해졌다. 평고 출신들은 주로 평양 주변에 거주했고 대부분 지주 상인층이었던 출신성분은 북한의 민주개혁 조치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전쟁, 학업, 경제상태 악화의 이유로 월남했다. 이들은 평양에서 사람들과 교류를 가질 수 있는 조건에 있었다. 또한 가족 중 엘리트 과정을 거쳐 이미 서울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거나 주변에 서울에 연고를 가졌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월남 초기 서울에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서울에 정착하지 못하더라도 지난 과거의 학습경험이 생존의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했다. 한국전쟁 이후 이들은 학업, 취업 등 다양한 이유로 도시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사실, 생산수단이 부재로 농촌에 거주하기 어려웠다. 이에 따라 도시에 정착해 개개인의 지식정도에 따라 상급학교로 진학하거나 취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다. 평고 출신들은 전문직, 관계, 학계에 진출하면서 서울에 정착하는 비율이 높았고, 일부는 이민을 떠나면서 평고 출신 대다수는 농촌보다는 도시에 정착했다.


The Refugee from Pyongyang Gobo recognized themselves as an elite of the city, and they shared this awareness with alumni while adapting to Korean society after the Korean War. They perceived themselves as representatives of the elite Korean people because they had a status as a middle-class elite in Korean society. As a native of Pyongyang Gobo, he adapted to the Korean society with the so-called “Pyongyang gobo spirit” as a weapon.
Pyongyang gobo' alumni's residents were mainly negative about the reform measures of North Korea due to their experience of living in Pyongyang and most of them were landowners and merchants. In addition, there were some people who had already entered Seoul after passing through the elite process in their family, or some people who had attached to Seoul in the surrounding area. Past learning experiences have 'pinan' important part of your survival.
After the Korean War, they began to enter the city for various reasons such as study and employment. In fact, it was difficult to live in rural areas because of the lack of means of production. As a result, they settled in the city and were able to advance to higher education or work based on their level of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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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서북출신 엘리트의 해방 후 남한 관료 진출

저자 : 이봉규 ( Lee Bong-kyu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09-138 (30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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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서북출신 엘리트들의 해방 후 관료 진출 양상을 살펴보는 가운데, 식민기시기 관료로서 행정체험이 어떻게 해방 이후에도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려는 시도다. 기존 연구에서는 서북출신의 일반적 특성으로 기독교-민족주의-반공주의를 초점에 두었다. 여기에는 서북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조선민주당계열의 정치지도자들 그리고 미국 유학경험을 지녔던 미군정기 고급관료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하지만 서북출신 관료, 특히 식민지 경찰들의 회고를 검토한 결과 만주와 조선 등지에서 일제에 협력했던 서북출신 엘리트들의 경험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식민지 경찰관료로서의 행정체험과 방공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정국기 냉전적 맥락 속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선택적으로 재생시켰다. 이들의 식민지 행정체험은 해방정국기 제주4 3을 비롯하여 반공국가 만들기의 기술이자 자산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결국 서북출신 엘리트들의 일반적 경향을 지역적 특성에 기초한 기독교-민족주의-반공주의, 나아가 친미로 규정하는 것에 더하여 서북출신 엘리트들의 행정체험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제기된다.


This essay attempts to see how the experience of the colonial period bureaucrats of the northwestern elites affected after liberation. In previous researches, Christiannationalism- anticommunism was focused on the general characteristics of northwestern elites. These included political leaders of the Democratic Party of the North, based in the Northwest region, and high-ranking officials under US military government who had studied in the United States. However, as a result of examining the recollection of northwestern bureaucrats, especially colonial police officers, it is necessary to consider the experiences of northwestern elites who collaborated with Japan in Manchuria and Joseon. Based on the experience of administrative and anti-communist experience as colonial police officers, they selectively reproduced their experiences in the Cold War context of liberation. Their colonial administration experience was utilized as skill and asset of 'anti-communist state' including Jeju 4.3 of liberation state. Finally, in addition to defining the general characteristic of northwest elites as Christian-nationalist-anticommunism based on regional characteristics, and also as pro-US, it is necessary to consider the cases of histories of pro-Japanese el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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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남 서북지역민들의 역사적 정체성 재확립과 강화, 1960~1970년대

저자 : 윤정란 ( Yoon Jeong-ra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39-180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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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에서는 1960~1970년대 월남 서북지역민들이 그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어떻게 재확립하고 강화했는지에 대해서 다루었다.
1960~1970년대 월남 서북지역민들의 역사적 정체성은 박정희의 강한 국가주의에 의해 민족사의 정통성이 되었다. 월남 서북지역민들은 서북지역의 중심인 평양에 대해 '민족국가, 민족정신, 민족문화'의 발상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민족을 구원하고 선도해야 한다는 선민의식을 가졌다. 이 지역민들이 월남한 이후에는 반공주의와 결합되면서 그와 같은 역사적 정체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월남 서북지역민들은 박정희 정권의 창출을 통해 그들의 지역적 역사적 정체성을 민족사의 정체성으로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첫째는 독립유공자 포상과 독립운동사 편찬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1962년부터 독립유공자 포상을 실시함으로써 정권의 역사적 정체성이 곧 월남 서북지역 민들의 역사적 정체성임을 공식적으로 드러냈다. 둘째는 월남 서북지역민들의 역사적 정체성은 박정희의 강력한 국가주의를 통해 확산되고 규율화되었다. 이는 학교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월남 서북지역 출신의 학자들은 그 정책을 주도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어린이대공원의 동상 건립과 기념사업을 들 수 있다. 이 공원에는 역사상 어린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인물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선정된 동상은 이승복, 정재수, 유관순, 이승훈, 조만식 등이었다. 이중에서 이승훈과 조만식은 월남 서북지역민들의 역사적 정체성이었다. 이승훈과 조만식 동상의 題字는 박정희가 직접 작성함으로써 민족적 지도자이자 사표임을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하였다. 이에 이승훈과 조만식은 서북지역 출신의 대표적인 근대 민족지도자인 김구, 안창호와 함께 1970년대 국정 국사교과서에 실렸다. 이로써 이승훈과 조만식은 지역의 영웅에서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을 통해 월남 서북지역민들은 그들의 역사적 정체성을 민족사의 정통성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This study discussed how refugees fleeing northwestern Korea between 1960s and 1970s reestablished and strengthened their historical identity.
The historical identity of refugees fleeing northwestern Korea in 1960s-1970s became a legitimacy of national history by Park Chung-hee's strong nationalism. The refugees fleeing northwestern Korea had a strong sense of respect for Pyeongyang, the center of the Northwestern region, with the pride that it was the birthplace of 'nation state', 'nation spirit', and 'national culture', and the elitism to save and lead the nation. After the local residents came to South Korea and as they joined the anti Communism, their historical identity became more solid. The refugees fleeing northwestern Korea, through the creation of Park Chung-hee regime, firmly made their regional and historical identity as a national history identity. It was accomplished through the following process.
First, it was through awarding prizes for the Independence Patriots and the compilation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Park Chung-hee regime awarded prizes for the Independence Patriots since 1962 and officially revealed that the historical identity of regime is the historical identity of refugees fleeing northwestern Korea. Second, the historical identity of refugees fleeing northwestern Korea was spread and regulated through the powerful nationalism of Park Chung-hee. This was conducted through school education, and scholars from the northwestern region of Korea led and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policy. The last is the construction of statues at Children's Grand Park and memorial activities. In this park, there were statues of figures that children could see and learn in history. The selected statues were Lee Seung bok, Jeong Jae su, Yu Gwan sun, Lee Seung hun and Cho Man shik, etc. Among them, Lee Seung-hun and Cho Man shik were the historical identity of refugees fleeing northwestern Korea. Through the process of Park Chung hee himself writing the letters on the monument of Lee Seung hun and Cho Man shik's statues, the regime was recognized nationally as a national leader and memento. Thus, Lee Seung hun and Cho Man shik, together with Kim Gu and Ahn Chang ho, representative national leaders of the Northwestern region, were published in the national history textbooks in the 1970s. Through this, Lee Seung hun and Cho Man shik became from regional heroes to national heroes. In this way, the refugees fleeing northwestern Korea successfully succeeded in making their historical identity a legitimacy of the national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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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해방 이후 민족주의적 관점의 한국 고대사 연구 사례와 문제점

저자 : 안정준 ( An Jeongjun )

발행기관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간행물 : 학림 42권 0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183-200 (1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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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에 진행된 한국 고대사 연구는 다른 시대사와 마찬가지로 식민사관의 극복과 한국사의 학술적 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목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고대사 연구의 기존 문제의식과 지향점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부터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2003년 중국의 동북공정을 통한 고구려사 귀속문제에 대응하는 과정, 그리고 최근 유사사학자들이 촉발시킨 '상고사' 논쟁에 대응하는 과정은 고대사 학계의 역사 인식이 갖는 문제들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이러한 비판들은 고대사 이외의 연구자들로부터 제기된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 연구의 현황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필자는 최근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樂浪郡연구와 唐代고구려 백제 유민 묘지명 연구를 통해 기존 연구의 인식의 한계가 무엇이었으며, 최근 연구동향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소개하였다. 이를 통해 고대사 연구에 근대 국민국가 의식과 민족주의적 관점이 어떤 형태로 개입되었는지를 밝히고, 최근 연구의 전환을 통해 향후 지향해야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간략히 언급하였다.


The study of Korea's ancient history since 1945 was conducted for a periodical task of overcoming colonialism and establishing Korean history. However, since the 2000s, a variety of professionals have begun to criticize the traditional direction of metabolic research. In particular, the Chinese government's response to the Goguryeo history issue through the Northeast Project in 2003 and the recent process of responding to the 'Sangosa' dispute sparked by pseudo-historians has served as an occasion to reflect on the problems of ancient history awareness. However, since the researchers who raised these criticisms did not major in ancient history, specific comments on the actual subjects of ancient history could not be made. I learned about the cognitive limitations of existing research and how recent research trends have changed through the study of Lelang commandery (樂浪郡) and Epitaph Records in Tang Dynasty. Through this review, the influence of modern national consciousness and nationalistic view on ancient history research was reviewed and briefly commented on the direction to be purs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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