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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립운동과 태극기

저자 : 윤선자 ( Seon Ja Yoon )

발행기관 : 호남사학회(구 전남사학회) 간행물 :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35권 0호 발행 연도 : 2009 페이지 : pp. 85-112 (28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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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특집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 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의 항일무장투쟁

저자 : 박민영 ( Min Young Park )

발행기관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구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간행물 : 동양학 47권 0호 발행 연도 : 2010 페이지 : pp. 233-258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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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문순태 소설 『타오르는 강』의 서사전략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성을 중심으로-

저자 : 조은숙 ( Eun Sook Cho )

발행기관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간행물 : 호남학(구 호남문화연구) 54권 0호 발행 연도 : 2013 페이지 : pp. 211-252 (4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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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년 동안 필자는 필자의 강의를 수강한 대학생 600여 명과 광주광역시에 소재한 중ㆍ고등학생 600여 명을 대상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 언제인지 설문지 조사를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대학생 76%, 청소년 87%가 모른다고 답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있어서도 대학생 36%, 중ㆍ고등학생 41%가 통학 열차에서 우발적인 충돌 때문으로 알고 있었으며, 대학생 14%, 중ㆍ고등학생 7%만이 식민지사회의 모순을 자각한 학생들이 조직적으로 전개한 학생운동이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본고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소설 작품 속에서 과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어떠한 형태로 형상화하고 그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제 식민통치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대표적인 학생독립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으로 형상화 한 작품은 시나리오 작가 최금동의 『이름 없는 별들』(영화)과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전9권) 밖에 없었다. 본고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문학적 형상화가 갖는 의미 추출과 그 정신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문순태의 대하역사소설인 『타오르는 강』이 가장 적합한 텍스트라고 판단하였다. 『타오르는 강』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통해 구현할 수 있는 문학적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19세기 말 전라도 영산강 지역을 배경으로 노비세습제 폐지에서 시작해 동학농민전쟁, 개항과 부두노동자의 쟁의, 1920년대 나주 궁삼면 소작쟁의,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의 서사과정을 3세대에 걸친 두 가족의 연대기 형식을 빌려 서술하고 있다. 또한 민중운동의 발생과정을 다뤘으면서도 도식적인 서사구조에 머물지 않고 나주 영산강 일대, 개항지인 목포와 제물포, 광주 등으로 서사 공간을 확장하고 있으며, 역사적 사건을 전면화하지 않고 다양한 삽화를 주변사건으로 차용하는 서사전략을 꾀하고 있었다.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충실한 연구와 자료 확보, 그리고 고증을 통해 있는 그대로 복원해 낸 작품으로, 현재까지 『타오르는 강』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상태에서 본 소설을 바탕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양상과 그 의의를 고찰한 것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재조명 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으로 본다. 역사란 과거의 무덤이 아니라 내일을 보는 훌륭한 창이 된다. 따라서 본고는 문순태의 대하역사소설 『타오르는 강』을 텍스트로 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서사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성의 정립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그 문학사적 의의를 추론하는데 그 목표를 두었다. 끝으로 『타오르는 강』에 대한 본고의 연구가 지난 80여 년 전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앞의 설문지 결과에 언급된 바와 같이 오늘날 집단 망각의 늪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일제의 식민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한 민족 정체성의 왜곡 양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하고, 아울러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와 이를 소재로 한 소설 연구에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For the past year, I have made questionnaire surveys asking about the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Day to 600 university students who took my lecture and 600 middle and high school students in Gwangju. As a result, 76% of university students and 87% of the youth answered “No”. When asked the cause of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36% of university students and 41% of middle and high school students answered it happened by accidental conflict at the commuting train. Only 14% of university students and 7% of middle and high school students recognized it as an organized student movement who were aware of the contradiction of the colonial society. This study began how the novels embodied and granted value on the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But, despite the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as being a representative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to destroy the colonial reality, there are very few pieces about the Movement besides pieces by scenario writer Choi Geum Dong`s 「Nameless Starts」(Film) and Moon Soon Tae`s “Blazing River”(9 volumes). This study determined Moon`s historic novel “Blazing River” as the most suitable text to extract meaning of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in terms of literature formation and succession of its spirit. As a means to secure literary possibility in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Blazing River” describes the narrative of family chronicles from abolition of the slave inheritance system, Donghak Peasant War, Port opening and riots of port laborers, Naju Gungsam-myeon tenant faming dispute in 1920s to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in 1929 with Yeongsan River area of Jeollado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as its background. While it handed the formation process of popular movement, it does not remain in formative narrative, it expanded its narrative space to the Naju Yeongsan River area, Mokpo, Jemulpo as port opening areas and Gwangju. While it did not deal with historic events at a full stretch, it adapts various scenes as surrounding events as a strategy of a narrative. Moon Soon Tae`s “Blazing River” is a work to restore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with faithful research, data and verification. As there is no comprehensive study in “Blazing River”, it is significant to examine the features and significance of the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based on this novel as it can provide a clue to re-consideration of the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It is because history is not a tomb of the past but a great window for tomorrow. And, this study aimed to estimate the literature significance of “Blazing River” as text to examine establishment features of historicity in the process of narrative of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Finally, a study on “Blazing River” would play a role as a level on Gwangju Student Independent Movement started in Gwangju 80 years ago, which was forgotten today as it awakens us to recognize the colonial ideology and distortion of national identity.

4독립운동의 성과와 계승

저자 : 한시준 ( Han¸ Seejun )

발행기관 : 단국사학회 간행물 : 사학지 60권 0호 발행 연도 : 2020 페이지 : pp. 167-200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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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을 기점으로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1945년 이전시기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독립운동은 단순히 일제와 싸운 것만 아니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역사를 변화 발전시킨 것들이 수없이 많았고, 이러한 경험들이 해방 후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거둔 성과가 적지 않다. 1919년 3월 1일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그해 4월 11일 ‘독립국’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새롭게 건립한 국가(대한민국)였고, 정부(임시정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족의 역사가 크게 뒤바뀌었다는 점도 있다. 단군의 고조선 이래 1910년까지 이어져 오던 군주주권의 역사가 국민주권의 역사로, 전제군주제의 역사가 민주공화제의 역사로 바뀐 것이다.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도 독립운동을 통해 마련된 것이었다. 일제가 패망한 후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점령하고 통치하였지만, 이들은 3년만에 물러났다. 미소 양군이 물러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43년 카이로회의에서 일본이 패망하면 한국은 자유 독립국으로 한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장개석을 움직여서 거두어낸 성과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생성된 정신적 자산도 있다. ‘독립정신’이다. 독립정신은 남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을 가능하다고 믿고 도전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운동의 상대는 일본이었다. 일본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흔히 독립운동을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비유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부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독립운동가들은 바위를 부수려고 도전하였고, 결국 바위는 부숴졌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 그리고 현재의 국회와 국군은 모두 독립운동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8월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1919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 재건한 것이다. 국회도 해방 후 새롭게 설립한 것이 아니다. 1919년 4월 11일에 설립된 임시의정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군도 마찬가지다. 흔히 국군의 뿌리는 미군정에서 설립한 국방경비대에 있는 것으로, 국군의 주체는 일본군 출신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미군정은 건군을 추진하면서 일본군 출신 이응준의 자문을 받았지만, 일본군을 내세우지 않았다. 광복군을 내세웠다. 이승만 대통령도 그랬다. 초대 국방부 장관과 차관에 이범석과 최용덕을 임명하였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광복군 출신들을 연이어 임명하였다. 해방 후의 역사는 독립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민족의 역사가 크게 변화 발전하였고,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해방 후로 계승되고 발전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그리고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 시대에 살게 된 것은 독립운동을 통해 마련되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It is difficult to understand as if history had begun anew since 1945. Before 1945, the Korean people started the independence movement to escape from Japanese colonial rule. On March 1, 1919, the government declared itself an "independent nation", and on April 11, 1919, it established the Republic of Korea as an "independent nation", and established a provisional government.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s a newly established state and government during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history of monarchy has been changed to the history of national sovereignty, and the history of despotic monarchy has been changed to the history of democratic republics.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government in August 1948 was established through the independence movement. This is because there was a promise at the Cairo Conference in 1943 that Korea would become a free and independent country if Japan was defeated. It was the achieve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that guaranteed Korea's independence. The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fter liberation, and the current National Assembly and the Armed Forces, all originated from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Korean government, established in August 1948, was reconstructed following the establishment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1919. The National Assembly originated from the Provisional Assembly, which was established on April 11, 1919. The root of the Korean army lies in the Liberation Army. The history of post-liberation has nothing to do with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process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history of the people changed and developed greatly, and these historical experiences were inherited and developed after liberation.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that today, we live in a country called the Republic of Korea, and in the era of national sovereignty and democratic republic, through the independence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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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한용운 독립운동의 이념적 지향과 실천

저자 : 이종성 ( Jongsung Lee )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학연구 107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207-232 (26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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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용운의 자유이념의 지향과 그를 바탕으로 전개된 항일독립 운동의 실천적 내용을 검토한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1) 3ㆍ1운동의 주도와 <공약삼장>의 정신, (2) 언론을 통한 독립의식 고취, (3) 불교개혁운동과 어용불교 철폐운동, (4) 자립역행과 조선물산 장려운동, (5)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6) 신간회 활동과 이념갈등의 회통모색, (7) 철학시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 등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았다. 한용운은 불교의 이념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그의 이념과 실천은 비단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발양되지는 않았다. 한용운은 철학과 문학 그리고 언론과 정치ㆍ경제ㆍ교육 등 다양한 방면의 전 방위적인 측면에서 자유이념의 구현을 위한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있었다. 한용운의 독립에의 이념적 지향과 실천은 지엽적인 민족독립의 성취나 개별적 국가의 평화구현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지구상 모든 국가의 자치와 평등 그리고 자유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이념적 지향성을 갖는다. 이러한 점에서 한용운의 자유이념의 지향과 그 실천적 행위는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This paper reviews Yong-Un Han`s liberal ideological orientation and activities based on his orientation regarding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under Japan`s colonial rule. In particular, this paper looks into 1) his leading role in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spirit of the three promises contained on the Statement of Independence, 2) his involvement in raising people`s awareness on Korea`s independence through the media, 3) his role in the Buddhism reform movement and government-sponsored movement to abolish Buddhism , 4) his involvement in indepenence-reverse and the campaign on promoting the purchase of Korean goods, 5) his involvement in promoting a national consciousness through education, 6) his activities through an anti-Japanese organization called Shinganhui and his efforts toward re-interpretation and reconciliation of ideological conflicts, and 7) his involvement in promoting a national consciousness through philosophy, poetry, and literature. Yong-Un Han led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campaign, primarily based on Buddhist ideologies. However, his ideologies and activities did not derive from his religion only. He was at the forefront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campaign on realizing liberal ideologies in diverse areas, such as philosophy, literature, media, politics, economics, and education. His ideological orientation and actions were not limited to achieving Korea`s independence or bringing about peace in an individual country. Rather, he was ideologically oriented toward realizing the autonomy, equality, freedom, and peace of all countries on the earth. In this regard, his liberal ideological orientation and actions can be said to be meaningful for world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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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기획논문 -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 총론: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

저자 : 이만열

발행기관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간행물 : 인문과학연구 24권 0호 발행 연도 : 2017 페이지 : pp. 9-29 (21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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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는 한말 개항 이후 국내외로부터 부닥친 시련과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형태의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때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외세의 침략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일제 강점기를 맞게 되었고 이에 저항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국토는 분단되었고 민족상잔까지 겹쳤지만 그런 험난한 역사 속에서도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갔다. 근현대시기에 이룩된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인과관계를 형성하면서 오늘의 한국을 형성해 왔다. 오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이라는 제목으로 갖는 이 학술 심포지움은 <강북구 근현대사 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다. 기념관이 위치한 이 강북구 수유리의 산자락에는 과거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독립유공자들의 묘역이 16기나 있는데 한말 헤이그 특사로서 현지에서 분사한 이준(李儁) 열사로부터 해방공간에서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정부를 세우려다 비명에 간 여운형(呂運亨) 선생도 누워있다. 뿐만 아니라 강북구에는 한국 현대사의 일대 전환점을 찍은 4.19영령들의 묘역이 또한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강북구는 실로 한국 근현대 민족 민주운동의 영령들을 모시고 있는 성지라고 할 것이다. 이곳에 근현대사 기념관이 세워진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이 학술회의의 의제인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은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헌법정신과의 상관성을 고찰해보려는 것으로 이해한다. 기조발제도 의미를 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한민국의 성립과 독립운동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학계 일각에는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해서 대한민국의 성립을 정리하려는 뉴라이트계의 역사관이 존재하고 있다. 오늘 주제는 대한민국(헌법정신)이 독립운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살펴보고 그것을 확인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한민국(헌법정신)의 성립을 독립운동과의 관련성에서 살펴보려면, 독립운동에 나타난 제반 인맥과 운동, 사상과 지향이 대한민국에 어떻게 녹아들어왔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대한민국 성립에 보이는, 독립운동의 운동적 측면과 사상적 측면이 먼저 고찰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의 다양하고 폭넓은 독립운동이 대한민국의 성립과 어떻게 관련되었는지를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제임을 절감, 우선 한국 독립운동을 개관이라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대한민국의 성립과정에서 대한민국 헌법이 어떻게 이뤄졌으며 그 정신이 어땠는가를 간략하게 살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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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계평화의 관점에서 본 3·1운동의 재인식: 3·1운동과 여성, 평화를 중심으로

저자 : 심옥주 ( Sim Ok-joo )

발행기관 : 한국정치사회연구소 간행물 : 한국과 국제사회 2권 1호 발행 연도 : 2018 페이지 : pp. 45-68 (2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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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3·1운동과 여성독립운동을 세계평화의 시각에 대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일본에 의해 국권을 상실했던 시기의 거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평화운동의 일환이었다. 특히 3·1운동은 민중운동으로서 계층과 지역, 성별의 구분을 넘어선 독립운동이었으며, 그 시대 독립운동이 지향한 독립과 자유에 대해 평화적 견지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 시대가 당면했던 독립의 과제는 시대적·민족적 견지에서의 독립이었으며, 평화운동의 일환이었다. 둘째, 3·1운동에 참여한 여성은 주체의지로 독립운동의 참여자, 실천자로 변화했으며, 독립운동사에서 한 주류로 한국여성독립운동의 맥락을 이어갔다. 셋째, 3·1운동은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유럽, 미주 등으로 확산되면서 아시아 약소국이 자유 의지를 발휘하는 데 영향을 주었고,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저력이 되었다. 이상에서 3·1운동은 세계평화의 관점에서 재인식되어야 하며, 3·1운동과 한국여성독립운동이 평화운동으로 주목받아야 할 것이다.


This study is focused on viewing the March 1st Movement, a national movement uprisen nationwid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and women’s independence movement from an angle of worldpeace. The March 1st Movement was held nationwide when our national sovereignty was lost, and it can be defined as a form of peace movement in view of world history. Particularly, the March 1st Movement was the people’s independence movement without distinction of class, region and sex. The direction of national independence and freedom impli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during that time period needs to be interpreted newly in view of world peace. Firstly, the urgent task to complete during that period was to accomplish independence in view of the times and the national people, and it was a form of peace movement. Secondly, the women who participated in the March 1st Movement changed into spontaneous participants or activists for the n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reafter, continued a history of women’s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 Lastly, the March 1st Movement became widespread domestically and to foreign countries such as China, Japan, Russia, Europe and America, so that its spirit of freedom and peace appealed to the weak countries in Asia. Furthermore, it worked as a spiritual support for the independence movement of Korea. As mentioned above, the March 1st Movement needs to be newly understood in view of world peace, and, out of that movement, Korean women’s independence movement deserves a highlight as a peace movement stream in the world history of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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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의 역할과 보천교의 독립운동

저자 : 전광수 ( Jeon Kwangsoo )

발행기관 : 한국종교교육학회 간행물 : 종교교육학연구 60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57-270 (1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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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종교를 탄압하려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1915년 포교규칙을 만들어 신도,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동학의 정신을 이어받은 천도교, 보천교는 물론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한 대종교 등을 유사종교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의 역할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망국과 도탄에 빠진 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과 민족의 단합을 이끌고 항일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동학을 중심으로 교세를 펼쳐나간 민족종교 단체의 항일활동은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체 오늘에 이르렀다. 당시 후천개벽사상은 억압과 수탈로 신음하는 조선인들에게 치유이자 희망이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의 동학사상은 증산에 의해 그 정신이 지속되어 민족종교운동은 급속히 전파되었다. 차경석은 수운과 증산의 가르침을 정치적으로 확대하여 암울하고 도탄에 빠진 식민지시대 백성들에게 후천개벽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면서 독립군 군자금 모집과 항일독립운동을 결행한 주요 민족종교 가운데 하나였던 보천교를 창시한 핵심인물이었다.


2019 marks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and the establishment of a provisional government in Korea. During Japapnese colonial era, The Choseon Governor-General’s policy to suppress ethnic religion was established in 1915 and only Shindo, Buddhists and Christians were recognized as religions. The two religions, Cheondogyo and Bocheongyo, which inherited the spirit of Donghak, as well as Daejonggyo, which focuses on the Bukro-military regime of General Kim Jwa-jin, have become similar religions. The most prominent of the roles of ethnic religion was to convey a message of hope to the people who were devastated and robbed of their country, to lead the unity of the people and to play a pivotal role in the anti-Japanese movement. Anti-Japanese activities by ethnic religious groups, which have spread around Donghak, have not been properly evaluated until now, and have reached today. At that time, the Huchongaebyuck idea was a healing and hope for the people who groaned with oppression and extortion. Suwoon’s Donghak Thought, which led to Donghak, was carried on by Jeungsan, so that the national religious movement spread rapidly. Cha Kyung-suk politically expanded the teachings of Suwoon and Jeungsan. As a result, it delivered the message of Hucheon’s hope to the grim and broken colonial people, and was a major ethnic religious group that organized the independence army’s military fund-raising and anti-Japanese independence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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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나석주의 생애와 독립운동

저자 : 김성민 ( Kim Sung-min )

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간행물 : 한국학논총 51권 0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321-354 (34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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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는 1910년 약관의 나이에 동지들과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려 했으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3ㆍ1운동 이후 1920~21년에는 황해도 일원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밀정 처단활동을 벌였다. 1924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과 경무국장을 맡아 임시정부의 보위에 힘썼다. 그는 몸을 내던지는 직접적인 의열항쟁을 지향하였다. 이를 위해 의열단, 병인의용대, 다물단 등 의열투쟁 단체에 관계하며 투쟁방안을 모색하였다. 1925년에는 다물단과 연계하여 독자적으로 국내 의열투쟁을 추진하였다. 국내로 침투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일제 착취기관을 폭파할 계획이었으나, 운동 자금 부족으로 좌절되었다. 결국 1926년 김창숙의 자금 지원에 힘입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 순국하였다. 1926년 나석주의 투탄의거는 의열단원으로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의열단의 의열투쟁 계획에 따라 추진된 것은 아니다. 그가 1925년부터 계획해 오던 국내 의열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봐야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온 몸을 조국 독립의 제단에 바치기를 갈망했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우리 의열투쟁사에서 그의 활동이 돋보이는 이유이다.


In 1910, Na Seok-ju at the age of 20 fled to China with his colleagues to devote himself to the Independence Movement and yet got arrested and jailed.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from 1920 to 1921, Seok-ju in Hwanghae province of Korea helped to raise Independent funds and to punish the conspirators with the Japanese colonial rulers of Korea. In 1924, he as a bodyguard and a chief police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strived to protect the security of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He supported active Heroic struggles, sacrificing one’s body and life for Korean Independence. To this end, he allied with different forms of Heroic organization such as Heroic Corps, Byeong-In Volunteer Corps, Damuldan and etc. and sought for the ways of revolutionary uprising. In 1925, he aligned with Damuldan, the major Korean anarchist organization in Beijing, and autonomously carried forward Heroic struggles. He planned to destroy the organizations set up by Imperial Japan such as the Oriental Development Company. However, his plan failed due to the lack of funds. Finally, in 1926 with the help of Kim Chang-suk’s financial support Seok-ju carried out the attack and threw a bomb at Oriental Development Company and Choson Bank. After carrying out the attack, he killed himself. Na Seok-ju’s patriotic deed in 1926 was carried out as a member of Heroic struggles. Yet, his action was not driven by the plan of Heroic Corps. Rather, his action should be seen in an extension of his domestic Heroic struggles since 1925. Na Seok-ju constantly longed to devote his entire life for the Korean Independence, and he put it in action. For such a reason, his action stands out in our history of Heroic struggles.

KCI등재

103.1 운동에 대한 보안법 적용이 타당성 - 유관순 열사를 중심으로 -

저자 : 김태수 ( Kim Tae-soo )

발행기관 : 한국비교형사법학회 간행물 : 비교형사법연구 21권 1호 발행 연도 : 2019 페이지 : pp. 235-256 (22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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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헌법 전문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 명시한 것처럼 3.1운동은 다른 형태의 독립운동과 달리 전국민이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이다. 하지만 보안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치란 국가의 주권자가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란 나라의 주권 혹은 통치권을 부인하는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주권 혹은 통치권의 안정을 전제로써 그 권력행사의 방법 및 권력 분배의 조직에 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은 제국주권을 부인하고 혹은 부인하려고 하는 행위이므로 이는 정치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법원은 정치라고 함은 단지 제국주권의 작용인 권력행사의 방법 혹은 권한분배의 조직에 관한 사항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제국주권의 존립에 관한 사항도 포함된다고 하고 하면서 3.1운동은 보안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영토의 일부를 제국 주권의 통치에서 이탈하려고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내란행위라 보아야 한다. 하지만 보안법을 제정할 대한제국 시기에는 내란행위에 대해서는 형법대전으로 처벌할 수 있기 때문에 보안법의 적용범위라 할 수 없다. 일제는 보안법이라도 적용하여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잠재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그러려면 독립만세 운동을 정치에 관한 행위라 판단한 것이라 추측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제 법원의 판단은 일제의 부당한 침략과 지재에 저항하고 국권을 되찾기 위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강한다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n the full text of the Korean Constitution, "Our people, brilliant with their long history and tradition, were built by the March 1 Movement …… As stated,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is an independence movement participated by the entire nation, unlike other forms of independence movements. In response to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many victims were killed through strong crackdowns, and those who were arrested and arrested were punished by applying the security law to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to increase the effectiveness of the punishment as much as possible to the extent permitted by the law. The security law was enacted during the Korean Empire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and abolished due to the annexation of Korea (1910), but regulations were prepared on a formal basis for application of the security law and the Japanese style law based on Article 324 of the Korean Empire's Decree (1910) and Article 1 of the Joseon Governor-General's Decree. However, the law's application is not seen as unfair as it adopts criminal justice in a formal sense, not actual criminal justice, although the meaning of “bullying” and “distorting security” as defined in Article 7 of the Security Law is not clear. However, the “politics” of Article 7 of the Security Law is the exercise of state power by the sovereign of the country. Politics, then, should be seen as not including the issue of denying a country's sovereignty or sovereignty, but about the method of its power exercise and the organization of power distribution on the premise of the stability of its sovereignty or sovereignty. Therefore, the March 1st Movement is an act of denying or trying to deny imperial sovereignty, so this is not about politics. However, the court said that politics does not just refer to the way of imperial sovereignty, or to the organization of power distribution, but also to the existence of imperial sovereignty, and that the March 1 Movement is a violation of the security law. However, an act aimed at breaking away from the rule of imperial sovereignty should be regarded as an act of rebellion. However, during the Korean Empire, which will enact the security law, civil war can be punished. After the annexation of Korea and Japan, Japan promulgated the Joseon-style Command in 1912, with Article 1 stipulating, "The following articles list 12 cases, including the criminal law, except in cases where special regulations exist in this spirit or other statutes." In other words, the Criminal Code cannot be applied to other statutes even if it is criminal under the Criminal Code. This requires the security law to be applied with priority over the Japanese criminal law. If, then, the security law is considered "an act aimed at breaking away from the rule of imperial sovereignty," or an act of civil war, then it should be construed as an unwarranted regulation, as it cannot be applied under the criminal law. If it was difficult to apply the civil war law, it would have been necessary to put the security law into effect and put it to rest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various parts of the country, and to do so, it is assumed that the independence movement was considered an act of politics. However, the judgment of the Japanese court can be said to be that the Korean people's will to independence is strong to resist Japan's unjust aggression and support and regain national sovereig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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